[영화] 탑 by. 홍상수
내가 홍상수 영화를 보던 시기를 떠올려본다. 남성의 찌질한 마초주의를 담은 초기작, 모호함이 절제를 이룬 미학의 중기작, 자신의 고백적인 요소와 자조적인 웃음의 후기작. 여러 가지 요소를 따져 봐도 홍상수의 영화를 어느 한 시점에서 봤다고 말할 수 없다. 그만큼 홍상수의 영화는 나의 인생에 있어 일종의 연결점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 영화가 있었고, 보는 동안 홍상수가 다가왔다. 이러한 의미 없는 농담마저도 감독이 내뱉는 영화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자조적인 행위마저 일종의 홍상수의 세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나만의 언어유희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나에게 홍상수는 나에게 영화언어의 사전이었다.
그러면 홍상수의 어떠한 영화를 나는 꺼내고 싶을까 고민했다. ‘극장전’, ‘옥희의 영화’, ‘지그맞틀’ 등이 스쳐갔지만 그건 잠시 뒤로 미루었다. 지금 내가 여러분께 이야기하고 싶은 단 한 편의 홍상수의 영화는 ‘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초기작도, 중기작도 아닌 나름 최근에 개봉한 그의 일기장 같은 작품을 꺼내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홍상수를 여러 번 거쳐 온 관객이라면 거쳐야 하는 그의 독설적인 고백이자, 변명이기 때문이다. 더 좋은 홍상수의 영화는 충분히 많다. 그럼에도 왜 굳이 홍상수를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영화 ‘탑’을 이야기할까? 무엇을 이유로 선택했을까?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홍상수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은 많다. 하지만 홍상수를 이미 알거나 홍상수의 세계를 마주한 이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나는 단 한 번도 홍상수를 마주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의 처녀작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에 노련한 어법과 음울한 영상미, 표현적인 그의 방식에 감탄했다. 다른 영화를 애기해 본다. ‘강원도의 힘’은 어떠한가? ‘북촌방향’, ‘하하하’는 그가 위선적인 코미디 영화를 찍었다.라는 감히 상상할 수 없던 관객의 어쩔 수 없는 감탄을 본 적이 있을까?
그토록 나는 영화를 홍상수 감독에게 맞춰 나갔다. 많은 영화의 표현을 홍상수를 통해 거쳤다. 그러나 충실한 변명을 늘어놓는 영화 ‘탑’에서만큼은 어떠한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침묵한 것은 아니다. 그의 지난 현실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도덕적인 사유의 문제로 인해 받아온 비난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탑’이 가진 침식된 시간의 불안정함은 홍상수를 완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그가 내놓은 숱한 변명의 결정이자 동시에 그가 마침표를 찍고 다시 그의 세계를 항해하겠다는 일종의 부표였다. 모든 이들이 홍상수의 변명에 동의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화해를 통해 영화 ‘탑’ 이후의 새로운 영화의 고찰을 시작해 나갔다.
물론 그 이후 영화들이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홍상수의 세계는 좀 더 깊게 퍼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앞으로 그가 얼마나 많이, 어떻게 영화를 찍고 우리에게 선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간만이 알려주겠지만 나는 딱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다. 홍상수는 자신의 생이 끝나기 전까지는 영화를 찍을 것이다. 영화 ‘탑’에서 1층의 첫 만남과 옥상에서 거쳐서 다시 그 시간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단지 어떻게 영화를 찍고, 영화를 이야기할 것인지는 감독의 이지에 따라 달렸겠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곧 개봉할 영화들도 여전히 의리로 홍상수를 본다는 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의리로 봤다면 홍상수를 얘기할 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홍상수니까 보고 말았겠지 하고 의미 없는 표상으로 지나쳐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홍상수의 세계를 마주할 때마다 지나치지 않고 한 마디씩을 건넨다. 그의 세계는 지각판의 변동처럼 변해있었다. 혹은 진부한 세계에 헤엄친다는 듯 유달리 부루퉁한 말투로 그를 깎아내리면서도 다시 그를 볼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