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 계속된 장염이 거의 끝나가는 아침, 발걸음도 가벼웁게 녹색 학부모 봉사를 나갔어요. 죽다 살아나서 발걸음도 가벼웁게 학교 가는 길. 까치가 옆에서 너무 당연하게 걸어와서 깜짝 놀랐어요. 쟤 뭐지? 하고 한참 쳐다보니 지도 저를 한참 보다가 다시 걸어가 버렸어요.
<뭐야 이 동네는 왜 새가 걸어다녀. 무서워.>
저는 전략적 요충지인 편의점 앞 4번 자리를 맡게 되었어요. 이곳은 학교 앞 이면도로와 아파트 진출입로가 만나는 삼거리로 등교시간 아이들이 가장 몰리는 자리예요.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려는 자들과 막아야 하는 자와의 신경전이 가장 극심하게 일어나는 곳이에요.
녹색 학부모의 상징인 주황색 조끼를 입었어요(엥?). 가려지지 않는 풍성한 인격 때문에 지퍼를 채울 수 없었어요. 인격자는 어딜 가든 드러나는 법이에요. 2주 동안 장 트라볼타와 데이트를 했는데도 평소에 갈고닦은 이놈의 인격은 그대로예요.
중요한 자리라서 전자 호루라기를 받았어요. 이거슨 빨간색 버튼을 누르면 삐로록 삐로록 소리가 나요. 녹색불의 숫자가 7이 될 때 애들을 막으면서 동시에 눌러야 한대요. 아...이게 뭐라고 심장이 떨려요. 나 잘할 수 있을까. 깃발 들 때 어색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진짜 호루라기 아닌 게 어디야. 덜덜덜.
깃발과 우비를 함께 수령해서 건널목으로 나갔어요. 자꾸 신호등에서 소리가 나요.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나세요.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나세요."
누구야 누구. 아 나구나. 의욕이 넘쳐서 너무 앞에 섰더니 센서에 제가 걸렸나 봐요. 아아 또 눈과 손과 발과 머리와 몸이 따로 놀려고 해요. 아무래도 몸 쓰는 일은 아닌가 보아요.
8시 30분부터 9시 10분까지. 1~2학년 어린이들만 학교에 가는지라 등굣길이 한산해요. 지나가는 애들에게 인사도 하고 괜히 멈춰 있는 차들도 한번씩 째려봐 주면서 무심한 듯 시크하게 깃발을 흔들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이 뜸해졌어요.
9시 8분에 녹색 어머니 두 분이 눈치를 슬슬 보시더니 깃발을 둘둘 말아서 들어가세요. 저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저 멀리서 오는 아들 한 명이 보여서 보내고 들어갔어요. 뭐 2분 아껴서 그 시간에 뭐 대단한 걸 하겠어요.
마치고 반장(회장?) 엄마가 오늘은 녹색 학부모 8명 중 아버지가 3명이라고 하시네요.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래도 녹색 부모계에서 여전히 남자는 소수자예요. 안내문에 다 "어머니"라고 쓰여 있어요. 지나가는 애들도 한두 명 엄마한테 물어요. "왜 남자가 해?" "응, 아빠가 오셨나 봐."
집에 가는 아빠들과 의미심장한 눈인사를 나누며 헤어져요. "오늘도 살아남자. 형제여." 8명 중 8명 아빠가 오는 날을 꿈 꾸어 봐요. 그날은 마치고 시간 되는 아저씨는 순댓국이나 한 그릇 하고 가시게요.
P.S. 걸어다니는 까치 때문인가... 발행하려고 하니 태그가 "무서운이야기"로 표시돼서 혼자 빵터진 것은 덤입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