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준 Dec 16. 2021

[영화추천-노매드랜드]③ 당신의 레종데트르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노매드랜드 – 긍정을 향한 모험   



 노매드랜드 또한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펀’은 경제성이 상실된 마을로부터, ‘밥 웰스’는 자살한 아들의 매서운 환영으로부터 쫓겨났다. 거부하다 못해 결국 쫓겨난 건지, 도망친 건지 헷갈릴 즈음에도 이 둘은 가슴 한 켠에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펀’은 남편에 대한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길바닥에서 만난 철없는 애연가에게 결혼식에서 낭송한 시를 들려준다. 결혼반지의 원이 상징하는 영원한 순환을 상기하며 ‘그댄 영원한 운율 속에 시간의 일부가 되리니’, 라고 말한다. 노매드의 지도자 격인 ‘밥’ 역시 어떻게든 망각하라고 두 머리를 때려대는 레테(망각)의 신에게 끝까지 저항한다. 아들의 자살이라는 사건이 소멸되면 잠은 잘 오겠지만, 그 대가는 사랑스런 아들에 대한 기억도 포기하는 것. ‘밥’은 이터널 선샤인을 위해 상처 또한 긍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때로는 상실이 존재의 의미가 되는 법. 그래서 그는 ‘펀’에게 희망을 논하고, ‘영원한 이별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되뇐다. keep life to live. 그리고 다짐한다. “기억되는 한 살아있는 거야.”라고.     

 


 잠깐씩 얼굴을 보이는 노매드랜드의 등장인물들 모두 각개의 동일성을 간직하고 있다. 죽음을 앞둔 암 환자이자 ‘펀’의 친한 친구인 ‘스웽키’가 지니고 있던 빛은 바닷새들이 수평선 위로 비상하며 창공을 선회하는 장면. 언젠가 이렇게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한 광경. 이 장면이 ‘스웽키’의 레종 데트르. 그녀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그곳을 향해 떠난다. 몇 달 후 아무말 없이 덩그라니 전송된 영상을 보며 펀이 말한다. “해냈군요.”     


 별을 간직한 채 살아가기 때문에 노매드들은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과 관계된 것들을 만나고 관계할 수도 있다. 인투더와일드의 주인공은 크리스에서 알렉산더로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었고,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들도 반한 절세 미녀(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섹스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지만, 노매드랜드의 노매드들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적은 없으므로, 자신으로서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두 영화의 베이스의 차이고 날숨의 온도가 다른 이유이다.

 돌이켜보니, 인투더와일드를 볼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위버맨쉬와 말세인
      

 낙원 같은 언니의 집을 떠나 굴러가는 게 신기한 미니밴에 올라타는 ‘펀’.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미묘한 심정. 수많은 사람은 ‘펀’이 그 곳에 남길 바랐다. 그런 사람들은 노매드랜드를 보고 울지 않았을 것이다. 니체를 읽으며 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펀’의 언니이거나, 언니의 남편이다. 편안함에 순응해버린 인생들.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 하지만 주어진 것들이 사라지면,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종말인. 그런 사람들은 ‘펀’을 이해할 수 없고, ‘위버멘쉬’가 될 수도 없다.     


 이 영화를 통해 현대문명으로부터 소외된 소수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런 동정심은 말세인으로 전락한 당신 자신에게나 어울리는 감정이다. 레비나스는 편안한 삶을 향유하는 것은 수동적인 사건이며, 따라서 우연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이 안정된 생활을 꿈꾼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느 정도 안식을 누린다. 여유를 기반으로 삶을 즐기고 인생을 그럭저럭 살만한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그런 삶에는 늘 균열이 생긴다. 균열이 커지고, 삶이 파괴될 때 그들은 삶을 저주하거나 원망한다. 그리고 자신 속에 자신을 내세울 숭고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편안한 일상에 빠져 나를 위대하게 만들 의지를 상실했다. 어느새 우리의 레종 데트르는 안락함이, 그리고 안락함을 상징하는 아파트, 자동차 따위가 되어버렸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거나 더 나은 것들을 갖춘 주변인이 등장할 때에도, 우리는 삶을 긍정하는가? 그럴 때 우리는 정부를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나의 유전자를 탓하고, 내 옆의 너를 탓하지 않는가? 위대한 예술가가 아닌, 세상의 명예와 물질을 향해 나아가는 낙타와 사자의 삶을 천만번 반복한다고 할 때 그런 삶에도 동의할 수 있을까? ‘펀’을 동정하는 관객들은 영겁회귀되는 삶을 견뎌낼 수 있을까?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겠다며 자연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삶에는 구원이 있을까. 모든 것을 집어던졌을 때 어린아이가 될 수 있을까? 억지로 모든 것을 버렸다고 온 주변에 선언하는 크리스의 표정과 산속으로 도망친 자연인의 표정은 어딘가 닮지 않았는가? 그들이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그 모든 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과거를 부정한다. 부정하고 긍정하려 하니 완전히 긍정할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어린아이는 집어던졌다는 사실로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내 아픔과 좌절도, 회한과 원망도 모두 내 삶이라고 외치며, 그런 삶을 긍정한다. 기뻐하는 게 아니라 긍정한다. 말세인의 안락함을 지향하지도 않고, 패배자의 르상티망에 빠져 권세자의 동정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나는 ‘펀’에게서 그런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어린 시절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모든 장단에 춤추던 내가 기억났다. 그리고 생각났다. 나는 어렸을 적 핫도그를 참 좋아했다.     


                                         

고귀한 삶을 위해

 자오는 영민한 감독이다. 카메라의 움직임만으로 메시지를 담는다. 미디엄 샷만을 고집스럽게 활용하고, 줌이 아닌 트래킹 숏으로 멀리서 가까이 다가가며 원근을 조절한다. 어디까지나 철저히 수평을 유지한 채로. 트래킹 샷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그것도 모래바람과 암석이 가득한 미 동부에서 트랙을 가설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녀는 ‘펀’에게 수평적으로 다가갈 때, ‘펀’을 비롯한 노매드가 누구보다 위버멘쉬같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은 우리에게,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진정 소중한 것을 되찾으라고 외치는 게 아닐까. 어설픈 동정과 상대적 부에 취한 채, 시류에 빠져 허우적대는 관객에게 일침을 날리는 게 아닐까.             

       

 만남은 거리를 만드는 예술이고, 탁월한 거리감은 우리를 위버멘쉬로 만든다. 세상과 너무 가깝게 지내다 보면, 세상에 잠식되고, 세상사의 것들이 내 안을 가득 채우면 나는 사라진다. 니체는 그런 부류를 말세인이라고 불렀다.     

 세상과의 연을 끊는 것 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다. 세상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세상을 부정한 채로 나만 남긴다는 것은 나의 존재론적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무리한 시도이다. 하루키가 먼 북소리를 듣고 훌쩍 여행을 떠났던 것처럼, 우리는 변해가는 나를 바라보면서도 지탱하고 싶은 무언가를 보존한 채 정처 없이 떠도는 실향민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 지탱할 무언가가 없다면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지려는 나는 영원히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루키는 이런 고백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방황하는 것은 내가 고향에서 멀리 떠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의지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어떤 독재자의 뜻으로 세상에 던져진 순간부터 나는 세상에 독존할 수 없다. 그래서 니체의 위버멘쉬는 모든 것과 절연한 단독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주변 세계와 감응하고, 유희하며 삶을 긍정하는 어린아이처럼 살라고 외친다.  

   

 노매드랜드의 ‘펀’은 아마 두 선택지 중 하나를 택했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을 옥죄는 모든 과거를 부정하고 떠나는 것. 인투더와일드의 크리스처럼 이름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잊고, 사랑받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삶. 그렇게 비우기만 하다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희미해질 때까지 정처 없이 떠나는 것. ‘펀’은 이런 방랑자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펀’은 소중한 것을 기억한 채 떠났다. 소중한 것을 기억해야 했으므로, 추억의 접시와 함께 주어진 상처도 끌어안아야 했다. 하지만 끌어안은 상처를 더 이상 원망하지 않을 때, 슬픔은 슬픔대로 내 인생이었다고 긍정할 때, 그녀는 무심한 듯 의연한 표정으로 노매드랜드로 향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보’를 가슴에 품고 ‘펀’으로서 세상을 Fun하게 살아보려고 다짐했다. 이런 긍정의 삶에서 위버멘쉬의 싹은 자란다.                         

 인생은 세상과 만나면서 세상과 거리를 두는 복잡한 여행이다. 당신을 지탱하게 해주는 건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과 함께 온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가. 그 상처를 긍정하며 세상을 떠나는 동시에 세상에 발붙일 수 있는가. 한발은 세상에 두어야만 다른 발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러한 영원의 리듬에 맞추어 나를 향해 떠나는 모험을 긍정하는 자들. 그들이 노매드가 아닐까. “그런 고귀한 당신과 만날 날을 기대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추천-노매드랜드]② VS Into The Wil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