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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Dec 16. 2021

[영화추천-노매드랜드]② VS Into The Wild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인투 더 와일드와 노매드랜드     

          

 

 세속을 뒤로하고 자연으로 향하는 또 다른 ‘출세간’적 영화, 인투더와일드가 생각났다. 하는 모습들과 행태는 유사하지만, 보는 기분은 참 다르다. 에드바르 뭉크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색감이 비슷해도,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른 것과 같은 이유일까. 뭉크는 새하얀 캔버스에 검정으로 절규를 드러내고, 베이컨은 검정 콜라주에 하양을 덧칠해 의자에 앉아있는 자화상을 그린다(어디까지나 필자의 해석에 의하면). 둘의 그림은 똑같이 슬프지만, 뭉크의 그림은 절규 속에 담긴 강인함이 있고, 베이컨의 그림에는 킥킥거리는 조소로 가릴 수 없는 심연의 두려움이 있다.     

 쫓겨난 자와 도망친 자들이 모두 똑같은 공기를 들이쉬어도, 내뿜는 숨소리가 다른 건 두 그림처럼 두 영화의 베이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베이스의 차이는 아무리 덮어버리려고 해도 쉬이 덮이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주절댄 것 중 확실한 게 있다면, 과거의 것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거나 반영되고, 나의 일부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인투더와일드는 검은 캔버스로 시작한 영화이다. 색감은 따사로운 햇살로 가득하지만, 이는 기만이다. 크리스의 자유분방한 미소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미소이기 때문이다. 은수저 정도 되는 24살의 크리스는 24,000불을 모두 구호단체에 던져버린 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로 무언가를 찾아 떠난다. 어떤 정서와 느낌과 정동으로 그런 비일상적인 모험을 떠났는지가 궁금해서 크리스를 아나키스트로 단정할 즈음, 크리스가 죽는다. Based on a true story 라는 문구와 함께 영화도 끝난다.     


 

 크리스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을 통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플라톤주의자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반문하고 싶다. 크리스의 죽음의 순간이 자유의 환희처럼 느껴지는가? 실수로 독초를 먹고, 아무도 없는 버려진 버스에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았다면, 그의 영혼이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갔을 것으로 생각할 리 만무하다.     

     

 자유는 행복만큼 그 층이 중첩적이라 소통하기 어려운 단어다. 자유를 향해 떠나는 모험은 언제나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애시당초 부자유한 삶을 선택할 자유도 주어진 적이 없다. 계약서에 도장 찍은 적이 없지만, 사회계약을 믿고 사는 것처럼, 자유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듯이 자유는 무제한적이지도 않고, 평면적이지도 않다. 자유는 자유를 제한하고, 자유가 제한되어야 비로소 자유를 보장받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고 믿느냐이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모든 필연성을 긍정할 때 참 자유를 누린다.”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크리스는 모든 제약을 벗어던졌다.               


                                   

인투더 와일드 - 자기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책으로 썼다면, 인투더와일드는 자기로부터의 도피를 영화로 그렸다. 인투더와일드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다 보니, 어느새 모든 것으로부터 쫓겨나 버린 크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면 모든 것으로부터 쫓겨난다. 그곳에는 쓸쓸함만 남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할 수가 없다. 자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신으로서 자유를 누릴 수도 없다. 로캉텡이 마로니에 나무뿌리 옆에서 구토를 했다면, 인투더와일드의 크리스는 낡은 버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존재론적 상실은 결국 삶의 근거를 무력화시킨다. 그렇게 자아가 상실된 다자이 오사무는 애인과 함께 수차례 투신했고, 오직 차이밖에 남지 않은 들뢰즈는 고층 아파트에서 자유낙하했다.     


 자기로부터의 도피가 진정한 구원이라고 믿는 사상도 있다. 자기라는 것 자체가 없다고 보는 사상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이는 불교의 중관학파이다. 중관학파는 깨닫는 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다. 당연히 눈물도 나지 않는다. 반면, 유식학파는 깨닫는 나만큼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연기의 사슬로 이어진 비실체적인 것이지만, 무수히 많은 업(Karma)을 설명하기 위해, 그 업의 주체는 파괴될 수 없다고 본다. 흄도 중관학파와 그 결이 같다. 자기가 자기를 자기라고 여기는 이유는 반복적인 인상에 의한 허약한 판단일 뿐, 그 인과적 확실성은 어디에서도 보장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책이 잘 팔리자, 자신이 데이비드 흄인 게 틀림없으니, 당장 인세를 내놓으라고 외쳤다.     

 나는 범인(凡人)이고, 그래서 저 경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크리스가 열반에 이르러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그리고 마지막 여정에 알렉산더 슈퍼트램프라는 가명을 쓰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파란 창공을 바라보며 나무에 새긴 이름은 원래의 이름, 크리스토퍼 존슨 맥캔들레스였다. 그 이름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토록 떠나보내려 했던 부모의 품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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