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에 평등은 없다.
누군가 개소리를 읊어댈 때, “그것도 네 생각이니까 동일한 한 표를 얻을 가치가 있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개소리에 평등은 없다.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에 대하여’를 썼고, ‘평등은 없다’도 썼다.
필자는 논문 검색 중 프랭크퍼트와 조우했고, 그에 관한 어떤 기사를 오독했다.
그래서 프랭크퍼트의 핵심 주장이 ‘개소리에 평등은 없다’라고 이해했다.
이는 오해였다.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에 평등은 없다’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하지만 필자는 ‘개소리에 평등은 없다’라는 말이 그의 진의를 더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나쁘다. 거짓말은 상대만을 속이지만, 개소리는 참과 거짓의 세계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신만은 진리를 말한다는 이율배반을 정당화한다. 다가올 대선 토론에서 양 후보의 개소리가 왕왕 들릴 것으로 예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들이 (차라리)거짓말을 하는 편이기를 바란다. 개소리가 아니라.
<개소리에 대하여 65p. 인용>
“개소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도 말하기를 요구받는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기회나 의무들이 화자가 가진 그 주제와 관련된 사실에 대한 지식을 넘어설 때마다 개소리의 생산은 활발해진다.”
개소리는 거짓말과 다르다.
거짓말은 참과 거짓의 존재를 전제한다. 하지만 개소리는 참과 거짓을 부정한다. 이를 다소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거짓말은 상대를 속이는 데 목적을 두며, 개소리는 진위의 세계를 부정하고 자신의 솔직함만을 가치있게 여긴다.
개소리가 참과 거짓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만 순전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참과 거짓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세계를 그려나갈 수 있는 분야는 액추얼한 문학의 세계일 뿐이다. 즉 리얼한 현실, 특히 정치의 세계에서 참과 거짓을 의식하지 않고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현실에서 참과 거짓과 무관한 말, 즉 개소리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참과 거짓으로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조현병 환자와 구분되는 것은, 모든 세상이 진위판단이 무의미한 개소리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자신만큼은 진정성 있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개소리에 대하여 66p. 인용>
“개소리를 하는 자들은 사태의 진상이 어떠한지를 인식할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반실재론적’ 신조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무너트리고, 심지어 객관적 탐구라는 개념이 이해 가능한 개념이라는 믿음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믿음의 상실에 대한 하나의 반응은 정확성(correctness)이라는 이념에 대한 헌신이 요구하는 규율에서 전혀 다른 규율로 후퇴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성(sincerity)이라는 대안적 이념을 추구할 때 요구되는 규율이다.”
이렇게 개소리주의자들은 공동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시도보다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전달해보겠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즉 사실에 대해 충실해지려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자신에 대해 충실해지려 노력해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에 확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류라고 가정하면서도, 우리 자신만은 확정적이며, 따라서 오직 자신에 대해서는 진정성과 진정하지 않은 부분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우리는 다른 것에 반응하면서 존재한다. 다른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도 결코 알 수 없다. 다른 것보다 자신을 더 쉽게 알 수 있다는 믿음도 근거가 없는 믿음이다. 결국 개소리주의자들은 이율배반이 체화된 사람들이다. 이는 거짓말하는 자들은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개소리주의자는 자신이 개소리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거짓말(거짓말은 물론 심각하게 나쁘다)보다 개소리가 나쁘다.
따라서 누군가 개소리를 읊어댈 때, “그것도 네 생각이니까 동일한 한 표를 얻을 가치가 있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개소리에 평등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