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마지막 날. 그렇게 말해도 괜찮다.
12월 31일에 하고 싶은 말. 나빴던 건 운명이거나 신의 섭리였다. 그러니 괜찮아.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는 해묵은 난제다. 스토아학파 이래로 ‘(강한)결정론’과 ‘운명’은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강한 결정론자를 운명론자와 동일시하고 글을 전개하겠다.)
일반적으로 운명론자는 ‘모든 것은 운명이니까’, 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중요한 건 ‘운명’을 논하는 사람은 ‘운명’에 대한 확신 때문에 ‘운명’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운명론자는 거창한 세계관이 아닌, 다른 종류의 근본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그 믿음은 자신이 아주 많이 무지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미화하기 위해, 우리는 ‘운명’이라는 표현을 늘상 사용한다. 사업에 실패한 것도 운명이고, 이별한 것도 운명이며,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하루를 망쳐버린 것도 운명이고, 부케를 받기로 한 전날 야식으로 치킨을 시킨 것도 운명이다.
물론 사랑 고백 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운명’을 운운한다. 노사연의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운명이야)’, 존 박의 ‘운명처럼’에도 ‘운명’이라는 단어는 등장한다. 어쨌든 ‘운명’은 목적을 향한 수단이지, 진실된 세계관의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운명’론이 허약한 사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생각보다 지혜롭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것이 인과의 연쇄로 결정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윌리엄 제임스와 찰스 샌더스 퍼스를 인용하지 않아도 안다. ‘테레사 수녀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 이기주의자일 뿐이다’라는 역설을 들이대지 않아도 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안다.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이론적으로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내일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스피노자의 반론처럼 그 선택이 태초부터 결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그 사실이 내 삶을 멋지게 바꿀 가능성을 소멸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운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심취하여 나에게는 진정 자유의지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나와 당신이 운명을 논하는 이유는 우리가 연약하고, 불안하며, 부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조금 더 멋들어지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12월 31일인 오늘. 이 말을 하고 싶다.
2021년에 실패한 것들은 운명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2022년엔 운명을 조금 덜 말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 이 글을 쓰는 순간, 운명적으로 칸트가 생각났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고, 판단력 비판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에 대해 답했다. (칸트가 조금 싫어할지 모르지만, 오늘은 괜찮겠지) 우리는 ‘2021년의 나쁜 일은 운명의 탓이었다’고 말해도 된다.
(타이틀 이미지인 ‘운명의 과학’ 이라는 책과 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