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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날 백대백 Jun 13. 2024

낮은음 자리표

16. 남문밖으로

숙원 지씨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서학西學을 공부한 실학자였고

자연스럽게 천주天主를 받아들였다.

지씨는 어려서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지만 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남편의 모습이 달갑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느 날 어린 지씨에게 천주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은 왕후장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천주天主의 자녀로 똑같은 사람이다."

그때부터 지씨도 천주를 공부하고 알게 되었다.


지씨와 지수는 궁궐을 나섰다.

궁밖에는 이미 둘을 태울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들을 태운 가마는 남대문을 향하고 있다.

궁궐을 나가는 것도 언감생심인데 남문밖을 나가야 하다니 지수는 왠지 모를 두려움이 엄습한다.


"마마 이곳부터는 걸어서 가셔야 하옵니다."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홍서방이라 불리는 사내가 말했다.

"홍서방 탁덕(鐸德;신부)님은 별일 없으신가?"

장옷으로 얼굴을 감싸며 지씨가 묻는다.

"예. 지금 거쳐로 옮기신 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어느 정도 적응하시고 계십니다.

워낙 타지에서 오래 생활하신 분이라 생활의 불편을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홍서방은 말끝을 흐린다.

"다만 무엇인가? 어서 말해보게."

홍서방은 이미 어둑어둑해진 길을 등불로 밝히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얼마 전 그분께서 향항香港으로 여러 물품을 요청하셨으나 이미 수개월째 연락이 되지 않아 염려하고 계십니다.

너무 무리하게 요청하신 게 아닌가 하고 또한 걱정하고 계시고요."


지씨는 뒤에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장옷을 깊게 뒤집어쓰고 걷고 있는 지수를 흘깃 보고 홍서방에게 말한다.

"그런가. 내 탁덕님을 위해 작은 도움이 될까 하여 궁내 가배상궁과 함께 왔네."

홍서방은 가배라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그가 모르는 지수의 존재가 못내 불안하다.

그것을 느껴서였는지 지씨는 이어 말한다.

"걱정하지 말게. 함께 온 가배상궁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네. 가배상궁도 우리와 같이 천주를 믿는 사람이라네."

지수는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것 같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지씨와 대화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얘기를 나눴었나 보다. 그런 것 같다. 아마도..

그리고 지수는 그들의 대화 속 탁덕님은 가배 즉 커피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일 거라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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