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친구야. 어떤 말로 시작해야 덜 어색할까 궁리하다 너에게 쓰는 편지라는 생각으로 인사를 건네본다. 네가 떠나간 지 4년이 됐다. 다른 친구에게서 네 소식을 들었던 날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나는 생애 첫 해외여행의 마지막 날 밤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때 한 통의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몇 분간 멍하니 휴대전화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같이 여행을 간 친구가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질문하기 전까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기쁨, 슬픔, 즐거움, 분노 같은 감정들이 내 몸 밖으로,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버린 듯했다. 나는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그 감정들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감정이 결여된 상태였다.
평소 친구들에게 연락 좀 하고 지내자는 말을 들을 때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는 말을 건넬 만큼 연락을 잘하지 않던 내가, 문득 네 생각이 나서 먼저 연락했다. 얼굴 한번 보자는 말을 건넸을 때 너는 시간이 없어 바쁘다며 다음을 기약했고 나는 '다음'이란 단어가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대구에 있었고, 만나려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바쁘다'는 말이 핑계처럼 들려서, 너의 대답을 듣고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무작정 약속 날짜라도 잡았을 텐데, 지나고 나서야 후회했다.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너를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너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없었다. 4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 이제야 너를 그리며 편지를 적는다. 육교 밑에서 대화를 나누며 웃던 모습, 너희 집 강아지와 친해지라며 도와주던 모습, 우리 집 앞 골목에서 사진을 찍어 달라며 서 있던 모습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휴대전화를 바꾸면서 주소록에 저장된 연락처를 옮기며 이번에는 너의 연락처는 따로 옮기지 않았다. 항상 너의 연락처도 같이 옮기고 답장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문자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너를 볼 수 없어도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을. 산책할 때면 네가 남아 있는 장소를 가끔 찾는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오랜만에 육교 밑을 지나가는 순간 네가 떠올랐다. 우리가 당장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너를 직접 마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네가 남아 있는 장소를 지나칠 때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가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 너를 다시 만날지 모르겠다. 내가 은근히 보기보다 튼튼해서 아마 강산이 몇 번은 바뀌어야 우리가 다시 상봉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만난 날 멋진 모습으로 네 앞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볼게. 안녕 친구야.
23. 0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