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받았다.
"이 쪽에는 돌을 깔아서 구불구불 산책로 길을 만들고, 오솔길 주변에는 꽃을 심어 가꾸고 산책하다 쉬어갈 수 있게 벤치도 하나 놓아두자.
집 주변의 멀쩡한 밭을 파헤쳐서 자갈길을 만들고 길 주변에 꽃을 심자는 마누라의 황당한 제안에 성격 좋은 남편은 수시로 발생하는 철없는 마누라의 주특기인, 자다가 봉창 뒤지는 소리가 또 시작되었구나 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줌마가 또 뭔 소리를 해? 멀쩡한 밭을 파서 길을 만든다고? 길 만들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항암도 졸업하고 지쳐있던 몸도 어느 정도 회복기에 들어선 남편이 마누라의 황당한 제안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우리 집을 예쁘게 가꾸고 당신이 팔십이 되면 그때에는 친구들을 불러서 이 집에서 팔순잔치를 할 생각이야."
“팔순잔치?”
순간 남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팔십까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지만, 우리에게 팔십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채워야 할 삶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이십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마누라의 행동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근심이고,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아서 늘 걱정이라던 남편이 팔순잔치라는 마누라의 원대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들은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삽자루를 움켜쥐었다.
남편은 그 순간부터 그렇게 쉬지 않고 꾸준히 삽질을 했다.
삽으로 조금씩 땅을 파나가면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해가 떨어져서 컴컴해져야 집에 들어올 만큼 그 일이 재미있다고 했다.
그렇게 남편은 들깨를 심던 밭으로 사용했던 공간에 돌을 하나씩 주워 날라서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만들어 나갔다.
남편이 삽질을 하고 지나간 자리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돌길이 새롭게 다듬어지고 개통되었다.
나는 남편의 손길에서 태어난 구불구불한 돌길을 보니 저절로 신이 났다.
"누가 깨 심었던 밭에 이런 근사한 길이 뚫릴 거라고 상상이나 해봤겠어? 좌우지간 땅 팔자나 사람 팔자나 알 수 없는 일이야."
집 주변에 산책로 길을 만들면서 남편에게 굳이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제안했던 이유는 이 곳에서만큼은 절대로 뛰어다니고 싶지 않아서였다.
천천히 느리게 음미하면서 걸어 다니고 싶었다.
이전에 남편과 나는 뛰어다니면서 바쁘게 사느라 집 주변조차도 천천히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우리에게 삶의 여유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아프고 나서 사회에서 자가 격리되어 백수가 된 이후에야 제대로 된 휴가를 받았다.
아프기 전에는 회사일과 농사일을 병행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지만 아프고 난 이후에는 회사도 농사일도 그 어떤 것도 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무작정 쉬어가기로 했다.
가끔은 아프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삶과 우리의 삶을 비교해보며 우리가 고여 있는 물처럼 발전도 없고 정체되어 있지는 않은지 불안감도 밀려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긴 인생의 여정 길에서 잠깐 모든 걸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이 시간도 어쩌면 신이 그동안 죽도록 일만 하고 살았던 남편을 측은하게 여겨서 특별히 내려준 깜짝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 이 길에서만큼은 절대로 급하게 뛰어가다 넘어지는 일 없도록 천천히 걸어가자.
가다가 꽃구경도 하고 다리 아프면 앉고, 힘들 땐 나무 그늘 밑에서 쉬어가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