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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뿔난 토끼 Apr 24. 2021

잘 가. 좋은  친구야.

나는 네가 언제나그리울 거야

조용했던 시골마을 우리 집 옆의 빈 공터에 새로운 땅주인이 등장했다.

새 주인은 이 곳에 공장을 지을 계획이라고 했으며 땅을 구입하자마자 경계측량부터 하더니 자기 땅의 여기저기에 말뚝을 박아서 빨간 깃발로 표시를 하고 우리 땅과 자기 땅과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해두었다.

그 덕분에 내가 시집와서 이십오 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우리 집 땅으로 알고 살았던 곳이 실제로는 우리 옆집의 땅이었고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애정 하던 내 친구 밤나무는 우리 집 땅에 살던 밤나무가 아니라 옆집 땅에 얹혀살던 우리 집 밤나무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결국 새로 이사 올 이웃의 땅 주인은 자기네 땅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우리 집 밤나무를 베어버릴 계획이라고 했고 이 일로 남편과 나는 새로 측량을 의뢰해서 우리 집의 값진 보물인 밤나무를 다시 찾을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주변의  돌아오는 대답들은 예전의 측량은 주먹구구식이라 잘 맞지 않는 반면에  요즘의 측량은 GpS 식이라서 정확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해도 별 수없을 것이라는 말뿐이었다.


젠장.

그동안 내 것이라고 애정 했던 것들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었구나.

그럼 도대체 온전한 내 것은 어디에 있는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요 몇 년 동안 남편이 암에 걸리고 투병하는 과정에서 내가 가진 웬만한 것들은 다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아직도 나에게는 빼앗길 것이 더 있었나 보네.


남편이 아프고 나서 웬만큼 시시한  인간관계는 시간차를 두고 알아서 정리가 되어버렸고,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쇼핑을 하는 등의 내가 그동안 누렸던 소소한 일상의 여유는 순식간에  사라졌으며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봄부터는 친정엄마까지 암에 걸려 한 집에서 두 명의 암 환자를 케어하는 시간까지 보내다 보니 내 머릿속에는 잠시도 암이라는 단어가 떠날 날이 없었고, 잠을 자기 전에도 암에 관한 생각뿐이었고 잠에서 깨는 순간에도 암에 대한 고민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남편은 암 중에서도 살벌하기로 소문난  췌장암,  친정엄마는 그나마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대장암이었는데 

과연 어떻게 해야 내 가족들을 괴롭히는 암들과 편안한 이별을 할 수 있을 것인가가 나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렇게 내가 암이라는 고통의 최면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마다  답답한 마음에 집 텃밭을 거닐다 보면 좋든 싫든 결국은 우리집 텃밭 가장자리에 서있는 밤나무와 마주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내가 고민이 생길 때마다 습관처럼 밤나무 아래를 거닐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우리 집의 성품 넓은 밤나무는 '너의 힘든 고통을 내가 다 알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감싸주었다.

고집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서 암과 기약 없는 밀땅을 하며 혼란과 혼돈으로 점철된 일상을 참 아내가며  숨만 간신히 쉬고 살아내던 내게 밤나무의 품은 넓었고 충분한 휴식과 위로를 전해주었다.

석양이 지는 시간에 밤나무 아래에 서면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삶의 기운을 느끼게 해 주었고, 이른 아침  밤나무 아래를 거닐면 쓸데없이 근거 없는 희망에 기분이 들뜨기까지 했다.


봐!

내가 지금은 모든 걸  다 뺏긴 것 같지만 내게는 아직도  이렇게 멋진 친구(밤나무)가 있거든.

난 괜찮아.

네(밤나무)가 있어서 든든해.

넌 언제나 내 힘듬을 온전하게 알아주고 위로해주니까.

그러니까 내가 너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게 되거든.


그런데 말이지, 네가 갑자기 없어진다고 하니 나는 너무 두렵다.

그동안 내가 힘들 때마다 너를 찾아와서 하소연하고 위로받고 다시 용기를 얻었는데 이제 네가 없으면 누가 너 대신 나를 품어주고 내 대책없는 이야기를 들어줄까?

너와 내가 만난 건 이십오 년밖에 안됐지만,  너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 자리에 서 있었고 이 땅에 대한 슬픈 역사나 행복한 기억도 다 가지고 있을 텐데 네가 없어지면 그 누가 너처럼 이 땅과 그 주변까지 아울러 품어주고 사랑해줄까?


언젠가는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너를 못 보게 될지도 몰라서 나는 벌써부터 마음이 허전하고 아리다.

내 친구야.

밉상인 내게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온전하게 위로해주고 내 삶을 응원해 준 것 절대로  잊지 않을게.

잘 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나는 언제나 너를 내 고마운 친구로 꼭 기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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