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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뿔난 토끼 Mar 07. 2021

함량 미달 보호자

훌륭한 인생의 조력자


췌장암 수술을 마치고  수술실에서 돌아온 남편의 모습은 처참했다. 남편의 몸에는 여러 대의 낯선 의료장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몸에 연결되어 부착된 여러 기계들은 남편을 침대에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으며, 마취가 풀리기 시작해서인지 남편은 무통주사를 맞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통증으로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일그러졌다.      

남편의 몸에 부착되어 시시각각으로 몸에 나타나는 신호를 보내주는 여러 대의 장비들을 보더라도 췌장암 수술은 간단한 수술이 절대로 아닌 것은 확실했고 앞으로도 몸의 회복이 그리 빠를 것 같지 않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만큼 남편의 몸 주변에는 여러 대의 기계들이 뒤엉켜있었다.     

수술한 날 오후에 간호사가 당부했다.

"환자에게 오늘 밤에 열이 날 수 있어요. 대부분 수술하면  첫째 날에서 셋째 날까지  열이 많이 나요. 열이 나면 보호자가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얼음 팩을 겨드랑이에 넣어주어서 열을 내려주셔야 해요."

"네에~"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보호자인데 그 정도야  껌이지.

그런데 간호사가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남편은 밤 열두 시가 됐는데도 열이 나지 않았다.

'진짜 내 남편은 의사의 말대로 상위 1%의 체력이 맞긴 하구나. 수술 첫날인데 열도 안 나고 그냥 지나가 주네.'     

그동안 나는 남편의 췌장암 진단을 받고 난 후에,  수술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아서 편한 잠을 단 하루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술 후에 비록 아픈 모습이긴 하지만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살아있는 남편의 모습을 확인해서인지 긴장감이 풀려버렸고 보호자 침대에 눕자마자 편안하고 깊은 잠이 스르르 들어버렸다.     

실로 오랜만에 단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나를 지켜보며 잘 잤냐고 묻던 남편이 새벽 한 시에 고열이 났었노라고 했다. 

순간 당황했다.

"그래서?"

"얼음팩 겨드랑이에 대고 물수건 이마에 대서 열을 내렸지."

"으응, 간호사가 해줬구나?"

"아니? 내가 했어."

"어? 자기 아직  못 움직이잖아."

"침대에서 내려와서 몸에 매달린 기계들을 끌고 세면대까지 걸어가서 물수건 축여왔어."     

"어."

면목이 없다. 

밤새도록 통증에 시달리며 열과 사투를 벌였을 남편을 생각하니 가슴이 시렸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구나.’     

췌장암 수술 환자의 몸에는  수술 첫째 날에 기계가 많이 매달려 있어서 움직임이 결코 쉽지 않다. 그나마 2인 병실이라 침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세면대가 있기에 망정이지 거리가 먼 6인실이었으면 그 새 뭔 일이 나고도 남았겠다는 아찔한 생각마저 들었다.     

더군다나 기계가 한두 대도 아니고 여러 개에 매달려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안타깝고 눈물이 난다.     

"나를 깨우지 그랬어."

"안 그래도 간호사가 자기 깨우려고 해서 내가 못 깨우게 했어."

"왜?"

"자는 모습이 너무 피곤해 보여서."

"....., 오늘 밤에 또 열나거든 그때는 나 꼭 깨워. 자기 많이 아팠겠네."

"응, 그럴게."

남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이튿날 밤에도 열두 시까지는 커피에 들어있는 카페인의 도움으로 버티는 척했지만  나는 또다시 새벽 한 시를 못 넘기고 졸다가 속 편하게 쿨쿨 잠이 들었다.

암만 생각해도 에어컨 빵빵한   2인실 병동에 산소가 부족해서 쉽게 졸리지 않았나 싶다.     

둘째 날에도 병실을 여관방으로 착각한 잠 많은 마누라 덕에 또 열이 오른  남편은 역시나 대롱대롱 매달린 여러 기계들을 거느리고 물수건을 축이러 세면대를 왕복해야 했다.               

지나고 생각해도 나란 인간은 참 대책이 없다.

그런데 그때, 열을 내리기 위해 스스로 세면대와 침대를 왕복하던 내 남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외과수술의 꽃이라는 췌장암  대수술을 받고 몸도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 열이 펄펄 끓는 위중한 환자를 옆에 두고 맘 편하게 쿨쿨 잠에 취한 마누라를 보며 긴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설픈 보호자에게 기대지 말고 내 목숨은 나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더 열심히 물수건을 축이러 세면대를 왕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보기에도 아까운 하늘같은 내 남편님.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자기가 지긋지긋한 췌장암한테도 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꿋꿋하게 버티고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어 준 인생의 조력자는 바로 나야 나.

내가 그 날 물수건만 제대로 닦아 줬어 봐.

자기는 의존 형 인간이 돼서 무조건 보호자에게 기대려고만 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날 내가 잠을 많이 잔 것은 다 자기를 위한 깊은 뜻이 있었던 거야.

오죽하면 광고에도 이런 말이 있겠어?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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