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여울 Sep 26. 2023

80대 중반이신 부모님과 함께 불국사에 갔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엄마의 뒷모습


부모님을 모시고 경주 불국사(佛國寺)에 다녀왔다. 불국사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종종 바람 쐬러 가던 사찰이다. 내 고향인 대구에서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이어서 한나절 나들이 코스로 좋은 곳이었다. “우리 ㅇㅇ, 경주 구경도 시켜 주고 점심도 사 줘야지.”라고 말하시면서 운전대를 잡으셨던 아빠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불국사에 마지막으로 가 본 지 30여 년이 되었다. 보문단지 내 힐튼호텔에서 부모님과 하룻밤을 묵은 후 불국사로 이동했다. 불국사 일주문(정문) 주차장에 내려서 매표소를 향해 걸었다. 관람료가 많이 인상되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지난 5월부터 관람료가 면제되어 무료입장할 수 있었다. 천왕문을 향해 슬슬 걸어갔다. 길 왼편에 넓게 펼쳐진 반야연지가 내 눈길을 끌었다. 연못은 초록빛 연잎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푸른 하늘과 각기 다른 초록빛 나무와 연잎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다웠다. 반야연지를 따라 천왕문으로 향해 걷는 길이 참 평화롭게 느껴졌다.


반야연지


불국사 천왕문


천왕문을 통과했다. 서쪽으로 연화교와 칠보교가 보이고 동쪽으로 청운교와 백운교가 보였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오르면 극락전으로,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을 통해 대웅전으로 들어설 수 있다. 불국사에 오면 의례히 이 계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중학교 친구들과 재잘재잘 대며 단체 수학여행 사진을 찍었던 그날도, 오빠와 동생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지난날들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추억의 장소에 다시 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불국사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토함산 옥로수를 마실 수 있는 작은 약수터가 있었다. 날씨가 무척 더워서 조금만 걸었는데도 땀이 나고 목이 말랐던 터라 약수터를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물바가지에 졸졸 흐르는 약수를 받아 무더위에 바짝 마른 입을 축였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물바가지에 물을 받아 마셨다. 약수터 옆에는 불교용품점과 기와접수처가 있었다. 소망이 적힌 기와 여러 장이 비스듬히 쌓여 있었다.  


토함산 옥로수 약수터


불국사 대웅전 입구에 도착했다. 불국사(佛國寺)는 이름 그대로 부처님 나라를 현실 세계에 옮겨 놓은 절이다.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극락정토를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는 사찰이다. 나도 같은 소망을 갖고 부처님 나라에 발을 내디뎠다. 제일 먼저 다보탑을 보았다. 다보탑은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문화재청 자료 참고).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더없이 화려한 석탑이었다.


다보탑을 배경으로 같이 온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다보탑 주위에 사람들이 잠시 뜸한 찰나를 포착해 다보탑 사진을 찍었다. 불교 신자인 엄마는 탑돌이를 했다. 뜨거운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합장하여 시계방향으로 탑을 돌았다. 중간중간 반듯하게 허리 굽혀 정성껏 기도를 했다.


다보탑


대웅전으로 갔다. 나는 대웅전 밖에 서서 부처님께 합장 인사를 드리고 내려왔다. 부모님은 대웅전 안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부모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대웅전 앞뜰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색색의 연등이 줄에 걸려 있었다. 바람이 불면 연등 소원지도 따라 흔들렸다. ‘가족 건강, 화목, 행복, 좋은 인연, 시험 합격, 승승장구, 재운 발복…’등 가족들을 위한 소망이 소원지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모두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나도 빌어 주었다.


대웅전 앞뜰


석가탑


석가탑을 보았다. 화려한 다보탑에 마음을 빼앗겼던 지난날과 달리 심플한 형태의 석가탑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단순하고 절제된 아름다움, 당당하고 기품 있는 자태에 홀린 듯이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석가탑은 무영탑이라 불린다. 무영탑에 얽힌 백제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픈 사랑이야기도 생각났다.


부모님과 함께 설전과 극락전천천히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왔다. 불교미술관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왔으니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기념품 하나를 사고 싶었다. 쭉 둘러보다 보니 생김새가 천주교 묵주 팔찌와 비슷한 단주에 눈길이 갔다. 직원분이 내게 단주는 불교 신자가 아닌 분들도 많이 사 간다고 했다. 각각의 단주에는 소원 성취, 건강, 행운, 금전운, 마음 안정 등을 기원하는 특이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건강을 기원하는 문양이 찍혀 있는 단주를 선택했다. 동생에게도 줄 요량으로 하나 더 골랐다.


건강을 기원하는 단주, 싱가포르에 돌아와서는 보석함에 잘 넣어 두었다


봉투에서 단주를 꺼내 손목에 차려는데 엄마가 조금 후에 차라고 했다. 단주를 불전에 올리고 부처님께 기도한 후에 차야지 하셨다. 성당에서도 성물을 사면 신부님께 축복을 받고 사용하는데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극락전으로 올라갔다. 엄마는 단주 2개를 들고 극락전 안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저만치 떨어져서 회랑에 매달린 연등을 구경했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엄마가 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뒷모습이었지만 얼마나 간절하게 얼마나 정성 들여 기도하는지 내 눈에 다 보였다. 고관절도 좋지 않고 새끼발가락도 아파서 절하고 일어서는 게 힘들다고 하셨는데 팔순 엄마가 나를 위해 한참 동안이나 기도하셨다. 그 자리에 서서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물이 터져버렸다.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 저 너머로 황급히 걸었다.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쳐들어 눈을 깜박였다. 조금 후 엄마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게 보였다. 나는 손짓을 하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엄마는 나와 동생의 무병장수를 위해 빌었다고 했다. 가슴이 찡했다.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엄마를 뒤따라가며 얼른 눈물을 훔치고 밝은 목소리로 한 톤 더 높여 말했다. 옆에 계셨던 아빠가 “우리 ㅇㅇ, 오늘 불국사 오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하셨다.  


일주문을 향해 내려갔다. 문득 대웅전으로 올라오면서 보았던 느린 우체통이 생각났다. 느린 우체통에 엽서를 넣으면 일 년에 두 번, 6월 30일과 12월 31일에 엽서가 발송된다. 오늘 이 느낌을 글로 써서 부모님께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는 음료수를 좀 사 오겠다고 말하고선 느린 엽서를 사러 갔다. 느린 우체통 옆에는 엽서를 쓸 수 있게 볼펜이 비치되어 있었다. 부모님 몰래 급히 쓰다 보니 제대로 할 말을 못 썼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썼다. 엉겁결에 “사랑해요”라는 말도 써 버렸다. 올해 마지막날 12월 31일에 발송될 엽서를 느린 우체통에 넣었다. 부모님은 2024년 새해에 내 엽서를 받아 볼 것이다.


느린 엽서에 "사랑해요"라고 썼다


따가운 햇살에 눈이 부셨다.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저 멀리 토함산이 보였다. 현장학습 온 유치원생들과 인솔하는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나는 부모님과 발걸음을 맞춰 일주문을 향해 걸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여러 번 왔을 그 길을 다시 함께 걸었다. 불국사에서 사진 몇 장 찍고 갔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부처님께 합장 인사도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도 했다. 엄마가 절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그 모습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세월이 나를 익게 했다. 불국사에 남겨 놓은 세 사람의 발자국을 찾아 언젠가 또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해요"라고 쓰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