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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Nov 27. 2024

싱가포르에서 자가용 없이 살아본 1년, 어땠을까?

불편함 속에서 찾은 작은 여유

                                                                                                 

작년 12월, 15년 동안 함께했던 자가용을 폐차하면서 우리 가족은 큰 결심을 했다.


“이번엔 자가용 없이 살아보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1년 가까이 새 자가용 없이 지내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한 번 맛본 자가용의 편리함을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다. 폐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는 순간순간 ‘그래도 자가용 한 대 사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유혹이 스쳐 지나갔다.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무리 비싸도 자가용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데? 그냥 중고차라도 한 대 사지?” 


그 말이 잠깐 솔깃하게 들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중고차를 구매하더라도 COE(차량 취득 권리증) 료 시점까지만 사용할 수 있으며, 이후에는 COE를 갱신해야 하므로 장기적으로 경제적 이점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신차 구매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생각하면 사고 싶다는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싱가포르에서 신차를 구매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2024년 11월 기준, 쏘나타 2.0을 구매하려면 약 2억 원이 필요하다. 차량 가격만 약 4,600만 원이고 COE(차량 취득 권리증)만 해도 약 1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 추가등록세, 부가가치세, 차량등록비, 보험료, 도로세까지 더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 금액이다.


남편과 나는 이제 50대 중반이라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자가용을 사서 매달 자동차 할부금을 부담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15년 전에는 싱가포르의 경기 침체로 자가용 구매 비용이 급격히 떨어졌고, 그 기회를 틈타 자가용을 장만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자가용은 정말 유용했다. 이른 새벽, 졸린 눈으로 차에 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나마 눈을 붙이는 아이들을 보며 '자가용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학원 픽업이나 딸의 미술 작품을 학교로 실어 나를 때도 자가용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내가 일일이 픽업해 주지 않아도 되고, 남편도 해외 출장이 잦아 자가용을 사용할 일이 많지 않다. 이제는 필요한 경우에만 택시를 이용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자가용 없이 살겠다는 결심은 간단했지만 그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동할 때는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10분쯤 걸어가야 했고, 시내로 가려면 한 번은 환승을 해야 했다. 차로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지하철로는 50분 가까이 걸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싱가포르의 더운 날씨 속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게 힘들었고, 아침잠이 많은 내게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종종 이용했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Dhoby Ghaut(도비곳) 지하철역이다.


시간이 지나며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게으른 습관도 많이 고쳐졌다. 자가용이 없으니 거의 매일 4천 보 이상 걷게 되어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택시를 이용해 보았더니 출근 시간대에는 지하철보다 약 10분 정도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를 호출하고 기사님이 집까지 오는 시간, 교통 혼잡 등을 감안하면 결국 지하철과 시간 차이가 별로 없었다. 결과적으로 지하철을 타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자가용을 운전하지 않아 가장 편리한 점은 주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주차비가 저렴한 곳을 찾아 목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곤 했지만, 이제는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서 바로 이동하면 된다. 게다가 기름값, 주차비, 자동차보험료, 자동차세 등과 같은 고정비용뿐만 아니라 배터리 및 타이어 교체 등과 같은 유지비 부담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 노선은 출퇴근 시간대에도 크게 혼잡하지 않았다. 3분 간격으로 운행되어 차 안에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내 앞뒤 옆으로 약간의 공간이 있어 다른 사람과 몸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9호선을 처음 타고 만원 지하철의 혼잡함에 깜짝 놀랐던 기억을 떠올리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자가용이 주던 소소한 행복이 가끔 떠오르기도 한다. 주말이면 쇼핑몰에 가서 아침을 먹고 장을 보던 일과, 남편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따뜻한 대화를 나누던 시간이 그립다. 가족끼리 외식을 하러 갈 때도 예전에는 차 안에서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이동했지만, 이제는 택시를 타고 가니 대화 없이 조용히 가는 경우가 많다.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차 안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3km에 이르는 오차드 로드의 반짝이는 불빛과 화려한 장식을 감상했다. 창문에 코를 대고 예쁜 풍경에 감탄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자가용 안에서 촬영해 두었던 동영상들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올해부터는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이어온 우리 가족의 연례행사를 더 이상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이런 작은 행복이 삶에 의미를 더해 주긴 하지만, 자동차 구매에 드는 막대한 비용과 은퇴 후의 불확실성을 생각하면,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가용의 편리함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대중교통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지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뚜벅이로 지내는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힘들지 않았다.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유지비 부담에서 벗어나 더 가벼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가끔 친구들의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자가용이 주는 안락함과 편리함에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내게는 절약의 즐거움이 훨씬 더 큰 만족을 준다. 자가용 없이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한 것은 우리 가족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처음엔 낯설고 불편했지만, 이제는 매일 걸으며 마주하는 또 다른 일상 속 풍경들이 내 삶을 채워 준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빨간 자트로파가 나를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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