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작별인사
"왜 김영하는 이렇게 김영하답지 않은 소설을 썼을까요?
누가 봐도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잖아요? 김영하답지 않아요."
모임의 회원 한 분이 말했다.
김영하니까, 김영하라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잠시 의아했다.
더욱이 그분과 내겐, 김영하 소설 중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검은 꽃>을 가장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검은 꽃>에서야말로 이야기꾼 김영하의 매력이 뚜렷이 드러난다는 데에도 생각이 일치했다.
그런데 <작별인사>에서는 의견이 완전히 갈렸던 것이다.
가만 더듬어 보면
작품 속 선이와 철이를 통해 반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본능
그 이야기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열망
생의 마지막 순간, 이야기를 끝맺고자 하는 선택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때
세계를 창조하고 인물을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작가적 행위야말로 가장 인간의 본질에 근접한 것 아닐까.
유발 하라리도 <사피엔스>에서 그렇게 말했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인지혁명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가름했다고.
또한 곰곰 생각해 본다.
작품에서 많은 로봇들이,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이 그랬듯 육신 없는 의식으로만 존재하게 될 때,
그 시간을 진정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내게 그럴 기회가 온다면 생의 마지막 순간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모임 회원 대부분이 육신과 함께 사라지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영원하지 않은 불멸’의 순간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도 있다. 영원하지 않은 불멸이란, 역시 그 끝은 내가 정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너무 오래는 말고, 100년 정도. 어쩌면 300년 정도. 의식으로 남아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과학자들이 인간 능력을 어디까지 개발하고 인류의 영역을 어디까지 확장할까?
질병과 범죄는 소멸했을까 아니면 더 큰 재앙이 닥칠까?
어쩌면 슈퍼 AI 썬더헤드가 다스리는 <수확자>(닐 셔스터먼) 속 세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내겐 그보다 소소하고 강렬한 욕심이 있다.
언젠가 <반지의 제왕>을 뛰어넘는 판타지 소설이 쓰인다면 다섯 번쯤 반복해서 읽고 싶다. <노트르담 드 파리>를 뛰어넘는 뮤지컬을 본다든가. 아, 그렇지. <유리가면> 완결도 기다려야 한다.
어쨌든 내 의식이 오래오래 남아 최후의 인간이 최후까지 써내는 이야기들을 읽고 싶다. 그러다가 언젠가 내가 원할 때, 이제 되었다 싶을 때 의식의 OFF를 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갑작스럽지도 파괴적이지도 고통스럽지도 두렵지도 않은 조용한 죽음. 소멸 혹은 데이터 삭제.
물론 혼자는 외로우니까, 내 의식 곁에 사랑하는
이의 의식도 함께 존재하면 좋겠다.(그 사람도 동의해야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육신이 없다는 결핍도, 기나긴 시간도 덜 두렵지 않을까.
문득 블랙미러 에피소드 <샌주니페로>가 생각난다.
그곳이 어디든, 어떤 형태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