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인(歸鄕印) : 잃어버린 대륙의 기억>

소설

by 산들강바람


프롤로그: 이천 년의 침묵, 깨어나는 인장


[ 무너지는 제국과 쪼개진 약속]


하늘은 핏빛이었다. 아니, 그것은 노을이 아니라 타오르는 도성의 불길이 구름에 반사된 절망의 색이었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마지막 보루였던 왕검성이 함락되던 날, 대륙의 심장을 흐르던 강물은 차마 흐르지 못하고 시신에 막혀 울음을 삼켰다. 한(漢) 나라의 거대한 함선들이 강을 메웠고, 철갑을 두른 기병들의 말발굽 소리는 대지를 찢어발겼다. 수천 년을 이어온 찬란한 제국의 역사가 단 한 줌의 재로 변해가는 찰나였다.


성벽 위, 마지막까지 검을 쥐고 있던 태자 '해륜'은 타오르는 도성을 등지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곁에는 피칠갑이 된 갑옷을 입은 두 동생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마지막 혈통이자, 흩어질 민족의 씨앗들이었다. 해륜은 품 안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벽옥(碧玉) 인장을 꺼냈다. 제국의 황제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의 상징이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형님, 이미 성문이 뚫렸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막내 동생의 절규에도 해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모두가 함께 움직인다면 적들의 추격에 몰살당할 것이고, 제국의 기록과 혼은 영영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 고귀한 벽옥 인장의 정중앙을 내리쳤다.


챙—!


날카로운 파동이 전장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졌다. 완벽한 원형이었던 인장은 정확히 두 개의 반쪽으로 쪼개졌다. 해륜은 떨리는 손으로 그 반쪽을 각각 두 동생에게 건넸다. 하나는 웅장한 기마병의 기상이 서린 '대륙의 기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훗날을 기약하며 힘을 비축할 '혈통의 증표'였다.


"듣거라. 오늘 우리는 갈라지지만, 우리의 피는 결코 섞이지 않을 것이다. 한쪽은 북쪽의 험한 산맥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제국의 기록과 비석을 지켜라. 적들의 눈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얼어붙은 대지를 견디며 살아남아라. 그리고 다른 한쪽은 남쪽의 반도로 내려가라. 그곳에서 평범한 백성들 사이에 숨어 힘을 기르고 자손을 번성시켜라."


해륜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단단했다. 그는 동생들의 손바닥에 쪼개진 인장을 꽉 쥐여주었다.


"남쪽의 후예가 대륙을 되찾을 힘을 갖추는 날, 그리고 북쪽의 파수꾼이 그 기록을 다시 세상에 내놓는 날, 이 인장은 다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고향, 이 광활한 지평선은 다시 우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리라. 이것은 항복이 아니라, 이천 년을 기다릴 거대한 '다음을 위한 기약'이다."


두 동생은 인장을 가슴팍에 품고 오열했다. 강물 너머로 적들의 함성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륜은 동생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어둠 속으로 등을 돌렸다. 그것은 가장 처절하고도 숭고한 이별이었다.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 대륙의 끝에서, 한 핏줄이었던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자국은 눈에 덮여 사라졌지만, 그들이 손바닥에 쥐고 있던 인장의 열기만은 얼어붙은 심장을 데우며 살아남았다.


그것이 '귀향인'이라 불리는 슬픈 낙인의 시작이었다.


[ 쇠붙이의 비명과 검은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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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고요함, 바람의 속삭임, 강과 계곡의 흐름, 그리고 바다의 깊이를 글로 담아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저에게 가장 진실한 위로와 질문을 안겨주었습니다. 수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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