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로 사는 삶.

by 호영

내 나이 만 스물아홉의 어느 날, 새빨간 육개장을 앞에 두고 나는 깨달았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는 점심으로 주문한 육개장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큼직하게 찢긴 고기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먹음직한 점심이었다. 점심 값이라도 아껴보겠다며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 지 한참인데 오늘은 늦잠 자느라 시간이 부족해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지만 그래도 ‘먹는 게 사는 거지’ 생각하고 사 먹기로 했다.


요즘 기운이 없어서 오늘은 고기가 들어간 걸 사 먹어야지 생각하고 큰 결심으로 들어왔던 터라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허기가 목 끝까지 차올라 들어간 식당인데, 주문한 육개장이 내 앞에 있는데 먹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국물을 떠 입으로 넣으려고 했는데 식욕이 없었다. 이거 다 돈인데 억지로라도 먹어야지 생각했지만 숟가락이 무거워지더니 음식을 뒤적거리기만 하고 결국 한 입도 먹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에 혼자 들어와 육개장을 시키더니 고사만 지내고 있는 나를 사장님이 의아하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식어버린 육개장을 뒤로하고 식당을 나왔다.


나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다. 병원에 가는 건 나의 일이자 생활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병원 갈 시간이 없었다. 내가 의사 선생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CT촬영과 내시경 검사는 내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병원에서 한쪽 신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음과 동시에 암환자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나는 만 29살에 신장 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나는 3주에 한 번씩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임상시험에 참가하기도 했었고 고위험군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종종 응급실에 가기도 했고 여러 가지 부작용은 암세포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나의 일상에 침윤해 들어왔다.


3주에 한 번씩 가는 병원에서는 보통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환자분 지금 수치를 보니 잘 유지가 되고 있네요, 3주 후 다음 진료에서 다시 체크해 보겠습니다.” 큰일이 없으면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3주 뒤에 다시 만난다. 어느 날 이런 말씀이 나에게 ‘앞으로 3주는 생존하시는데 문제없을 것 같아요, 다만 3주 뒤에는 지구별에서 방 빼셔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계약연장 가능한지 보겠습니다.’ 이렇게 들리곤 했다. 3주에 한 번씩 보는 진료니 거의 1달, 나의 삶은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계약이 연장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삶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런 나의 삶을 ‘월세로 사는 삶’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는 겨울의 중간인 1월에 수술을 하였고 큰 수술 덕분에 한동안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본가로 돌아와 회복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매일 다가오는 새까만 새벽은 운수업을 하시는 아버지의 등짝을 삼켰고 장성한 아들 뒷바라지를 하는 어머니의 등에는 하얀 파스가 구름처럼 떠다니게 되었다. 나는 환자이긴 하지만 사회인이기도 하다. 내 몫의 1인분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눈을 볼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누워서 천장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서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1달이 넘어가니 나는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이미 관속에 들어간 것 같은 상태로 지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지낸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의 생각은 어떤 종착역에 닿게 되었다. 중요한 건 내가 왜 누워있는지가 아니고 나에게 다가오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살아있고 지금도 시간은 흐른다. 단 한순간도 나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시간은 없다. 누군가는 80번의 봄을 보고 누군가는 1번의 봄을 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삶은 나에게 그럼 봄을 맞이할 계약서를 써준 적이 없다. 나는 과거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고 나는 암세포 덕분에 조금은 가볍게 살아볼 용기를 얻게 되었다.


나의 30여 년의 삶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불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제나 여유가 없었으며 항상 손해보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모든 의사결정의 중심에 있었다. 나는 길어야 100년을 살까 말까 한 나의 삶을 천년만년 살 것처럼 고민했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수많은 걸림돌들을 먼저 생각했다. 나는 이미 삶이란 경주에서 내가 많이 뒤처져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런 불안감을 건강하게 해소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런 나에게 암이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암이란 친구는 나를 삶에서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너무 많은 고민들로부터 벗어날 용기를 주었고, 조금 무모하다 싶은 도전을 할 때는 오히려 ‘뭐 어때? 너 지금 더 잃어버릴 거 없잖아?’라고 격려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을 넓힐 수 있었다. 경제적 사치라고만 생각하던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언제나 생산의 주체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뤄보고자 작은 동네 사진관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계절이 바뀌는걸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만 36세이다. 7년째 투병 중인 나는 아프기 전의 30년보다 배를 가르고 나서부터 나로 살아가는 기분이라 누군가 몇 살이냐고 물으면 7살이라고 대답하고 싶을 지경이다.


나는 아직도 침윤하는 암을 막기 위해 투병 중이다. 하지만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나의 우주에서는 암환자로 산다는 게 지극히 평범한 일이고 일반적인 일이이 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다음 봄이 끝내주게 아름다울 거라고 기대한다. 나는 암 덕분에 지구에 월세로 살게 되었고, 월세로 살게 된 덕분에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나에게 이런 축복을 내려준 암이라는 친구가 밉지만 무조건 밉기만 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