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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당무 May 04. 2021

이 세상 직장 내 모든 덕선이들을 위하여

생물학적으로는 나도 MZ

"당무 선배는 후배들한테 일 시킬 때 카톡으로 뭐라고 말해요?"

어느 날 점심 먹고 한 손에 커피 한 잔씩 들고 출입처로 돌아오는 길에 타사 후배가 내게 물었다. 나도, 그도 최근 인사 때 후배를 받아 팀에서 '잡진'(중간급 기자)이 된 터였다.


그 후배의 고민은 어미 선택에 관한 것이었다.  후배에게 취재 지시를 해야 할 때 말이다.

'이것 좀 알아봐'라고 말하면 너무 권위적인 것 같고, 그렇다고 '알아봐 줄래?'는 너무 저자세 같고, '알아보자'는 나도 같이 알아봐 줄 것도 아니면서 일을 시키는 마당에 너무 가식적인 것 같아서 결국 '해주삼', '해줄려', '해주시길' 같은 어정쩡하고 요상한 어미로 문장을 마치게 된다고 했다.


고민상담해줄 때는 한참 웃었는데 사무실로 돌아와 생각해보니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 후배처럼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했을 뿐, 나 역시 후배들에게 일을 시키는 카톡을 보내기 전 대체로 망설임의 시간을 가졌다. 그 망설임이란 곧 자기검열의 시간이었다. 너무 권위적이지는 않은지, 그렇다고 너무 사정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선배로서의 자존심과 기세를 어느 정도 지키면서도 후배가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의 적정선이 유지됐는지를 확인하는 나름의 퇴고를 마친 뒤에야 엔터를 누르곤 했다.


개인차는 있지만 내 주변 상당수 기자들은 말진(막내 기자)에서 잡진이 될 때 후배와의 관계 속에서 놀랍도록 소심한 스스로를 발견한 뒤 크고 작은 자괴감에 빠지는 경험을 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친한 타사 기자도 최근 막내 후배를 받은 이후로 본인의 소심함과 후배의 무례함 중 어느 쪽에 귀책사유가 있는지를 물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한 번은 후배에게 이모티콘과 함께 수고했다고 카톡을 보냈는데, 후배가 몇 시간이 지나서야 말라빠진 멸치 대가리처럼 무미건조한 답장을 보내왔다고 했다. "기분 나쁠 만한 거죠? 제가 너무 소심한 건가요?!" 말로 털어놓으면 정말 소심한 고민 같이 들리지만 그게 내 일이었다면? 나도 후배의 답장이 오기까지 그 몇 시간 동안 간간히 휴대전화를 쳐다보며 신경이 쓰였을 것 같다.


나 역시 홍당무의 위상에 걸맞게 후배들에게 하이퍼 소심함을 내뿜어대고 있다.

후배에게 '우리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는데 막상 매점에서 캐모마일 티를 주문하는 후배를 보며 내가 그냥 사무실에 있고 싶은 애를 억지로 데려왔나 미안하고 뻘쭘해진다. 일이 퇴근시간을 훌쩍 넘겨 끝나면 저녁이나 같이 먹고 귀가할까 싶다가도 선배랑 저녁 먹느니 밥때를 놓치더라도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싶을 것 같아 후배를 그냥 보낸다. 오늘의 날씨, 코로나19, 출퇴근길 애로사항, 휴가계획처럼 안전하고 보편적인 대화주제들이 고갈돼 어색한 마음에 소개팅을 화두로 던졌다가 아차차 싶어 후배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업무 영역에서 발동하는 소심함이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상황이 분명하면 고민할  없다. 후배가 확실하게 실수했거나 명확하게 잘못했다면 내가 취할 행동도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고민은 대부분 애매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한 번은 후배가 제출한 휴가기간에 출입처의 주요 일정이 잡혀 있었다.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일정이 있는 줄 몰랐나? 아니다. 일정 정리는 후배 담당이라 모를 수가 없다. 후배 없이 일정 커버가 가능할까? 후달리겠지만 가능할 것도 같다. 후배는 이미 비행기표도 끊고 호텔도 예약했을지 모르는데 아무래도 휴가 일정을 조정하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출입처의 주요 일정은 피해서 휴가를 잡는 게 좋겠다고 일러둘까 싶었지만, 그럼 이번 휴가부터 취소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질까 봐 그마저도 관두었다.


막내에서 잡진으로 올라서고부터는 종응팔의 덕선이가 느꼈을 법한 서러움을 느낀다.

막내로서 받던 관심과 격려는 어느새 사라지고 책임 잔뜩 생겼다. '알만한 애가 왜 그러니?'라고 할 때 그 알만한 애 취급을 받으면서 잡진은 선배들이 시시콜콜 알려주지 않아도 눈치껏,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일을 처리 수 있기를 선배들은 기대한다. 무엇보다  MZ세대라고 불리는, <90년생이 온다>에서 소개되는 문제적 막내 후배들이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즉 선배들이 직접 나서야 할 곤란한 상황이 도래하지 않도록) 잡진들이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 그러나 선배들은 이 잡진들도 MZ세대라는 걸 종종 잊는다. 잡진들은 10년 이상 이 회사에서 버티고 적응하며 머리로는 회사의 니즈와 생리를 충분히 숙지하면서도, 동시에 후배들이 선배나 조직생활에 갖는 반감의 일정 부분을 마음 깊이 공감한다. "기자라고 쉬는 날에도 재깍재깍 연락이 닿아야 하나요? 그럼 그게 쉬는 거예요?" "그러게나 말이다. 근데 그래야 하더라고" 배세대와 후배세대에 한 발씩 담그고 있는 우리 잡진들은 이렇게 어정쩡한 양시론자가 되고 만다.


요즘 후배들 왜 이렇게 아쉬운 게 없어 보일까. 선배들에게 철벽 치고 선 긋고  말 다 하고 말이야. 나 때는  그랬는데! 무리 이런 '라떼식' 사고가 힐난받는 시절일지라도 후배들을 보면 가은 얄밉고 또 가끔은 부러워져서 자꾸 본전을 찾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정말 나는 막내였을 때 선배들에게 고분고분 예쁘기만 한 후배였을까?


돌이켜보면 어떤 선배는 나를 '당무쓰'라고 불렀다. '당무야'도 아니고 '당무씨'도 아니고 '당무쓰'가 뭐람. 또 어떤 선배는  '수고..', '부탁..'처럼 어미 없이 마침표로 아련하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도 있었고 '에디터 지시임', '부장 전달임'처럼 본인은 메신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유체이탈식으로 지시를 하는 선배도 있었다. 내게 아무지시도 하지 않고 본인이 일을 다 해버리는 선배도 있었다. (물론 그 반대도 있었지만)  선배들은 출생 연도 상 'X세대'에 속하는데, 포털 검색을 해보니 이 세대 대한 정의는 이렇다.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개성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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