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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당무 Apr 03. 2021

취하려고 마시는 게 술

소맥 랩소디

술이 내 사회생활의 팔 할이던 시절이 있었다.

어젯밤 마신 술이 채 깨기도 전 점심 해장술을 마시고, 새로 돌아오는 밤에는 새로운 술자리에서 새 술을 들이붓던 날들이었다. 치기가 탱천하는 20대 때 얘기가 아니다. 마음이 도덕 위에 확고히 서는 나이여서 '이립'. 그 30대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나는 술잔 위에 서있었다.


많은 술 중에 소맥을 좋아했다.

정해진 룰이 없어 맛이 다양하고 자유로운, 소맥은 랩소디였다. 오늘 달리고 싶다? 맥주에 소주를 섞자. 오늘 정말 세게 달리고 싶다? 그럼 소주에 맥주를 섞어야지.  후래자에겐 진한 소맥으로 타박을 놓고, 오늘따라 빨리 취하는 동료에겐 남들보다 소주 양을 반에 반으로 줄여 섞어 나름의 배려를 한다. 소주와 맥주의 비율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맥은 일종의 사회적 언어 같았다. 소맥을 만드는 과정도 재밌었다. 소주가 담긴 잔 두 개의 입구를 포개 한 손으로 움켜잡고 마치 달걀 깨듯 맥주잔 입구에 톡톡 내려치며 소주를 섞는 '계란주', 핸드폰 조명 위에 소맥잔을 올린 채 얼굴에 괴기한 역삼각형 그늘을 드리우며 원샷하는 '스포트라이트주'. 맥주병 입구와 소주병 입구를 포개어 세워두면 삼투압 현상에 따라 위쪽의 소주가 아래쪽 맥주와 저절로 섞황금비율의 소맥이  완성된다는 '삼투압주'.   시껄렁한 테이블 위의 행위예술들을 보고 웃노라면 무거웠던 오늘 하루가 좀 가벼워, 아니 잊히기도 했다. 


술자리는 사회생활에 있어 '숏컷'이 돼줄 때가 많다. 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술자리를 주기적으로 갖는 것으로, 술 한잔 걸친 김에 '속 깊은' 얘기들을 털어놓는 것으로, 서로가 등장하는 만취 에피소드 추억을 한 두 개쯤 공유하는 것으로, 상대와 내 사이는 생각보다  막역한 사이로 규정됐다. 취재원과의 술자리 인연은 취재에도 도움이 됐다.  사실 확인이 급할 때 전화를 받아주는 숨통,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정보를 귀띔해 빨, 그들에게 내가 생면부지라면 바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한 손에 숙취음료가 든 편의점 봉다리를 들고 택시 뒷자리에 테트리트 속 일자처럼 뻗어 겨우 출근하는 처지였어도 내가 사회생활을 제법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취재원과의 술자리라면 근무의 연장선으로 여겨 병든 닭들의 근태를 어느 정도 면죄해줬던 분위기도 이런 생각 한몫 거들었다.


이런 생활이 건강을 갉아먹고 있다는 건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술을 끊기로 마음먹은 건 몸보다 마음에 들어온 경고등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둘은 연결된 문제였다. 전날 과음에 녹초가 됐던 어느 여름날 점심시간이었다. 취재원과의 오찬 자리에서 나는 맞은편 취재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취해있어서가 아니라, 상대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이끌어갈 힘이 내 안에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빈 속에 들이부은 아이스아메리카노 때문에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카페인이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퍼져나가 눈알까지 뛰는 것 같았다. 숟가락을 들어 올린 내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감정 처리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화가 나는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혼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종료버튼을 꾹 눌러 먹통이 된 노트북을 강제 종료시키듯, 술로 내 감정을 간편하게 제압한 뒤 처박아두었다. 술 한잔에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것들은 해소되지 않은 채 마음 어딘가에 쌓여있었다. 나는 대외적으로는 주사가 없었다. 남들 앞에서 망신당하지 않겠다는 지독한 방어기제가 다행히 이 상황에서는 최후의 보루 노릇을 했다. 대신 내 스스로에게, 가족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울거나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몸도 마음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정말 그랬다. 그런데 멈추기가 어려웠다. 술을 마시고, 가짜 용기를 얻고, 사람들을 대하고, 일하는 것이 마음의 근육을 키워내 일상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고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이 되자 나는 인정해야 했다. 술로 얻은 게 있다면 그건 진짜가 아니라는 것. 실제보다 크게 부풀려진 가짜 용기, 가짜 추억, 가짜 인연들을 훈장인냥 여기며 숙취로 하루의 시작과 끝이 흐리멍덩해진 반쪽자리 허접한 날들로 내 인생을 채워나갈 순 없었다. 술을 안 마시면 하기 어려운 일들이 늘고 있다는 게 비참하고 무서웠다. 그래서 끊기로 했다.


요즘은 어떤 모임에 초대를 받으면 내가 마실 음료를 준비해 간다.

무알콜 맥주일 때도 있고, 짱구가 그려진 멜론맛 소다일 때도 있다. 회식 때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대신 맥주잔에 사이다를 따라놓고 건배를 할 때마다 잔을 올렸다 내렸다 정도만 한다. 다행히 술을 거절해도 당돌하다는 취급을 받지 않을 만한 연차가 됐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술 안 마신다고 눈치 주는 꼰대들도 많이 없어졌다. 모임에 나가 (특히 회식 때) 맨 정신으로 내 안의 홍당무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걸 지켜보기 힘들 때도 많지만, 괜찮다. 마음의 잔근육을 키우는 중이라고 여기고 있다.  사실 특종이야 술 마시고 다니던 그때도 못했고, 술을 아예 안 마시는 지금도 못하고 있다. 대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얻었으니 절주를 선택한 것은 내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술에 취하지 않은 홍당무는 빨갛지만 단단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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