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둘을 모시고 사는 형님 내외는 조카 둘까지 포함해 여섯, 신혼이었던 우리가 가끔 갈 때면 월요일 아침이 부산했다.
그날 아침 나 보다 앞서 바삐 출근하는 형님이 하는 말을 듣고.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이게 뭐지?" 했다.
"엄마 이빨 좀 닦아 주세요"
분명히 형님이 한 얘기였다.
세면대에서 수돗물 트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어머님께서 뭔가를 들고뛰어나오셨다.
틀니였다.
그때 형님은 30대 중반이었다.
아내로부터 들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렇다.
엄마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월급을 받는 사람이었다. 화신백화점 근처 옷 공장 다니셨다. 아침 출근 때마다 오빠가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울고 불고 난리였단다. 우는 아이 젖줄 시간도 없는 와중에 아이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음에 설탕을 타서 주는 일이었다. 따스하고 달착지근한 맛에 길든 오빠는 매일 아침 엄마와 그렇게 헤어졌다. 설탕물에 익숙해진 애기 잇몸이 성할리 없었다. 부실한 잇몸에 이빨이 버틸 수 있는 세월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빠는 젊었을 때부터 틀니를 꼈다.
가난한 시절 얘기는 아프다. 하지만 그렇게 슬프진 않다. 공감의 정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연민에는 늘 따스함이 배어 나오지 않던가. 두루두루 가난했던 시절에도 행복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다. 왜 이런 말 있지 않은가. 사람은 결핍은 이겨내지만 풍요는 이겨내지 못한다는... 하지만 이런 얘기하면 욕먹지 않을까? 난장이네 가족은 매일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어머님의 기억은 1950년 대 말, 그 보다 조금 더 흘러가면 1960년 대에 머물러 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요즘도 했던 얘기 또 하시고, 조금 전 했는데도 또 하신다. 들을 때마다 새롭다. 형님의 틀니 얘기는 꽤 오랜만에 들었다. 다시 들어도 재미있다. 그런데 조금 슬프다. 슬퍼도 자꾸 웃음이 나온다. 이번에 형님의 틀니 얘기가 소환된 데는 이유가 있다. 어머니 틀니 윗치열에 있는 앞니가 하나 빠졌기 때문이다.
걱정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티고, 그 잇몸에 틀니로 씹고 사는데, 이젠 그 조차 하나둘씩 빠지시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