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원을 졸업했다. 멋진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냥 외벌이 가정에 전업주부가 되어있다. 남편은 가끔 한 번씩 이야기한다 '그럴 거면 그 돈 주고 대학원은 왜 간 거야?' 결혼을 할 때 즈음에 대학원을 진학했고, 양가 금전적 지원 없이 결혼한 둘이라서 나의 대학원 등록금은 사실 결혼자금이라고 해도 무방했지만 어쨌든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내가 놀았나?'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 진학을 꿈꿨지만 등록금 문제와 더불어 임신 중이라 쉬운 결정이 아니었고, 아이를 출산하고도 남다른 열정과 열의를 가지고 공부를 했더라면 가능했을지 모를 공부였지만 공부머리가 없는 나에게 한 가지만 집중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을 육아와 병행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하필 엄마와 떨어지면 울음 벨이 울리는 예민한 아이가 태어나 양가 어른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롯이 엄마의 손으로 키워내고 나니 척척박사를 꿈꾸던 여자는 어디에도 없고 '예민한 아이를 잘 다루는 비법'을 연구하는 전업주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내 기억 속에 나는 시험이라는 것을 깔끔하게 통과해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시험은 떨리고 긴장될 수밖에 없다지만 나에게는 긴장 그 이상의 괴로움이었다. 백분위로 평가되는 십 대의 성적표는 숨기는 것으론 부족했다. 차라리 놀기라도 할 걸,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기라도 하면 덜 억울하지! 놀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노느라 공부를 안 했던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이 좋았고, '좋은 질문!' 소리를 들으며 핵심을 찌르는 질문도 하고 싶었다, 선생님 말씀이 빼곡히 적혀있는 내 교과서를 누군가 빌려달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성적이 안 좋은 나의 교과서를 빌려가는 친구는 없었다 같은 반에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그 아이의 곁에 가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단정한 옷차림 속 반듯한 깃과 새 것 같은 하얀 소매 은은하지만 아낌없이 쓴 것 같은 섬유유연제 냄새, 청결하고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겨 싸가지고 온 다양한 종류의 과일 그리고 모두가 나누어먹을 수 있을 넉넉함과 웃으며 건넬 줄 아는 친절함까지..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불안정한 집 , 화목하지 못한 부모님, 사라진 나의 언니 그 아이 옆에 가면 나의 교복은 더없이 낡아 보였고 제대로 말리지 못해 덜 마른 와이셔츠의 냄새가 더 역하게 나는 것 같았다 일회용 봉지를 살 돈이 없어서 켜켜이 접혀있던 신라면 봉지가 짜증 나면서도 홧김에라도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오기라고 해야 할까. 지금 생각해도 철없을 십 대였지만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그래'라는 말이 참 듣기 싫었다. '이혼한 가정의 아이가 다 그렇지 뭐..' 하는 그 말이 거북했다. 그런 편견에 대항하기 위해 나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잘 자랐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정말 대견하구나' 같은 소리가 듣고 싶었다. 오직 그 말이 나를 위로할 뿐이었다 부모의 이혼은 자식인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엄마 아빠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아빠가 집에 빨리 오는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밤엔 '아빠의 쾅! 하는 문 소리가 안 들리길.. 엄마의 날카로운 눈빛이 담긴 매서운 고갯짓이 보이질 않길..' 두 눈을 꼭 감은채 잠이 오 길 바랄 뿐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엄마의 책장에 무수히 많이 꽂혀있던 책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혼녀가 된 엄마는 그 전보다 일을 하느라 더 늦게 귀가했고, 무거운 몸으로 퇴근을 하고 돌아온 엄마와 수다를 떨기는커녕 눈을 마주 보고 앉아 있을 시간도 없었다. 깨끗하게 치워진 주방을 보며 엄마에게 ‘잘했어’ 하는 칭찬이 듣고 싶어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청소를 다하고 앉아 엄마의 책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엄마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좋았다.
나름의 고난이 있었을 이십 대가 지나고 결혼을 한 나는 엄마와 시시때때로 연락하며 지낸다. 수도권과 지방간의 가깝지 않은 거리에 살기에 그렇고 엄마를 닮아 독립적인 성격 탓도 있다. 스무 살 이후엔 엄마는 먹고살기 위해 바빴고 그런 엄마를 대신해 나는 내 할 일을 알아서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가끔 만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장점이 많다.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즐겁게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 된다 싸울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잔소리에게 할애할 시간도 많지 않다. 시시콜콜한 결정을 지을 때에도 의견을 나누긴 하지만 결정을 강요당하지는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책장에는 책이 많았지만, 엄마는 잠을 이겨가며 책을 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책에서라도 해답을 찾고 싶어 책을 산다던 엄마에게 나는 그렇게 책을 가까이하는 법을 배웠다. 가정을 잘 돌본 엄마라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나는 엄마에게 배웠다
요즘 재밌게 본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평범한 부부가 뱃속에 아이를 잃자 주치의가 의학서적에 있던 메시지를 남긴다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내가 죄를 지어 그런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것이 큰 울림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헤어짐'은 특별한 일이 아님을 누구나 안다. 사랑하는 남녀가 좋은 마음을 유지하다가 여러 가지의 이유로 헤어지게 되는 일은 살다 보면 여러 번 겪기도 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존재하는 남녀의 이혼은 다르다 아이에게 부모는 온 세상이고 전부일 그 세상을 반으로 쪼개 버리는 일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의 이혼은 자식의 탓이 절대로 아니지만 그 선택의 영향은 자식이 온몸으로 맞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선택이 이혼이 되었다면 적어도 엄마와 아빠로서의 책임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나의 엄마와 아빠는 자신들의 이혼을 이유로 자식에게 행패 부리지 않았다. 한 가족이 따듯한 저녁밥상에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저녁식사를 하는 그림을 만들 어 줄 수는 없겠지만, 엄마 아빠 각자가 자식인 나를 위해 남아줬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나는 그때 배웠다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며 전업주부인 내가 나를 오롯이 최선순위에 두지 못하고 내가 여태 쌓아온 커리어를 활용하지 못한채 육아를 해야하는 것에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하지 않다 딱히 복직할 회사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공부가 어려운 내가 다시금 공부를 한다는게, 내가 할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두려운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업무가 힘들었던 남편이 귀가해서 미운 말을 할 때면 화가 조금 나기도 하지만) 육아 이전에 임신과 출산은 내 결정에 의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억울할 일도 아니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의 불화로 인해 평범한 가정 속 화목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 불행 속에서 선택과 책임을 배웠다. 그때의 내가 꿈꾼 화목이 성인이 된 지금 결핍처럼 남아 부모가 된 지금 내 가족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따금씩 뒤돌아 본다. 나는 오늘도 화목한 가정을 꿈꾼다 그때 엄마가 아빠를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봐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