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찰나의 순간

2018년 5월의 일상_19. 엘 부르고 라네로->레온

by 에이치영

18일 차: 엘 부르고 라네로 -> 레온_05:40 - 14:10(39km)

라네로 공립 알베르게는 방이 구분되어 있지만 천장이 뚫려있었다. 그래서 옆방에서 큰 소리로 코 고는 아저씨 덕분에 오늘도 빠른 기상. 조용히 짐을 챙겨 아래로 내려오니 공용 공간에 침낭을 깔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역시 귀마개도 뚫고 들리는 코 고는 소리가 심하긴 했나 보다. 주방으로 들어가서 짐을 챙기고 이른 시간에 걷기를 시작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은 깜깜한 새벽, 어제 노을을 보면서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을 확인했지만 조금 무서웠다. 다행히 사립 알베르게에서 출발하는 일행이 있어서 부지런히 뒤쫓아 걸었다. 무섭기도 하고 하늘 위 별들이 보여 아름답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여명과 일출에 별들은 오늘 밤을 기약하며 서서히 사라져 갔다. 도로 옆길을 따라 걸으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은 정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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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2075.JPG <까미노 사진 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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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시간에 혼자 걷는다는 건 무섭지만 조용하고 상쾌하고 아름다웠다.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만큼 내 마음에도 상반된 감정이 있었다. 해가 뜨는 건 서서히 빛으로 주변을 밝히다가 한순간에 쏙 하고 떠오른다. 마치 꽃이 필 때도 꽃봉오리 속에 한참을 있다가 어느 순간 활짝 피는 것처럼. 왜 아름다운 건 찰나일까. 그래서 놓치기도 쉽다. 사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내 인생의 기회, 황금기를 꽃이 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아무리 오랜 시간을 서서히 주변을 밝히고 있더라도 꽃봉오리로 움츠리고 있더라도 언젠가 한 번은 해가 뜰 거고 꽃이 필 거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던 해가 뜨는 순간, 꽃이 피는 순간은 올 거라고 믿는다.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 놓치기 쉬운 순간. 그래서 더 아쉽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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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큰 도시, 레온에 들어가는 날. 그리고 가장 오래 걸어야 될 날이다. 쫓기는 마음으로 걷고 싶지 않아 호텔을 예약했다. 욕조에서 몸을 푹 담그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고. 새벽에 마을을 출발한 뒤 약 13km는 마을이 없다. 그냥 묵묵히 걸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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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리에고스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확실히 대도시로 진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잡한 위성 도시들을 지나 큰 도로를 따라 걸었다. 이주 정도 길을 걷다 보니 구경거리와 편의 시설이 많은 대도시보다는 조용한 작은 마을이 훨씬 좋아진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눈을 사로잡는 풍경도 없고 도로 옆을 따라가니 시끄러웠다. 그러다가 반대 방향으로 걷는 아저씨를 만났다. 사람들이 전부 생장-> 산티아고로 걷는 건 아니다. 아주 가끔씩은 반대 방향으로 오시는 분들도 계신데 지리적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 집으로 걸어서 돌아가는 분들도 계신다. 만약 시간이 많아서 70일 일정으로 올 수 있다면 생장-> 산티아고-> 생장으로 걸어보면 재미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마을마다 쉬면서 천천히 걷던가. 하지만 오늘은 무조건 빨리 레온에 도착하고 싶단 마음에 엄청 빠른 속도로 걸었다. 가도 가도 나오지 않는 레온. 결국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 도로 옆 작은 테이블에 앉아 어제 싸 둔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잠시 쉬고 일어나니 다리가 너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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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을 먹고 마지막 마을을 빠져나오니 슈퍼를 만날 수가 없었다. 해는 뜨겁고 도시로 들어가는 길을 차도여서 순례자들은 돌아서 도심으로 들어가야 했다. 너무 힘들었을 때 만난 도네이션 테이블. 지갑에 있던 동전을 다 털어서 기부 함에 넣고 시원한 탄산음료를 마셨다. 정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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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들어가는 길에 차가 많아서 위험해서일까. 레온으로 들어가는 길이 바뀌었다. 블로그에서 봤던 육교를 지나는 길을 통제되었고 산을 하나 넘어가는 길로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이제 막 길을 바꿨는지 정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고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걷기가 힘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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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레온 도착. 대도시답게 레온 대성당으로 가는 길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호텔 체크인 시간이 좀 늦어서 일단 대성당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길가에 KFC 간판이 크게 있는 걸 보니 도시에 들어오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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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으로 들어오니 일요일이어서 그런 지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시골 마을에선 시에스타라 사람 구경하기도 어려운 시간인데...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중세 성벽도 보고 가우디 건축물도 봤다. 대성당 앞 광장에 도착한 뒤에야 드디어 도착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39km를 하루에 걸었다니. 한 시간에 5km씩 걸은 것 같다. 레온까지 걸으면 전체 일정 중 2/3를 마친 셈이다. 순례길 초반에 만난 대도시, 부르고스와는 다른 느낌이다. 부르고스는 오랜만에 만난 대도시라 마냥 반갑고 즐거웠다면 레온은 메세타도 끝나고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먼저 도착한 K 군이 호텔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하기에 호텔에 들려서 씻고 난 뒤에 대성당을 구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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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푹신한 침대와 욕조. 기분 좋게 오랜 시간 샤워를 하고 K 군을 만나 대성당으로 갔다. 레온 대성당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성당으로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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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대성당 안과 밖을 둘러보고 난 뒤 일요일이라 미사를 보러 갔다. 미사는 대성당이 아닌 옆에 따로 마련된 출입구로 들어가면 된다. 까리온 이후에 오랜만에 미사를 본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터라 따라가기가 어려웠지만 그냥 지금까지 아프지 않고 무사히 걷고 있음에 감사드렸고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미사가 끝나고 레온에 웍(중국식 뷔페)이 맛있다는 얘기가 많아서 먹으러 갔는데 쉬는 시간이었다. 난 기다리기 싫어서 먼저 호텔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가우디 건축물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직선이 아닌 곡선을 살린 디자인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성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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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쉬려고 호텔을 예약했지만 도시에 오면 오히려 볼거리가 많아 더 많이 걷고 쉴 수가 없다. 그래도 푹신한 침대에 누워 맛있는 감자칩과 시원한 레몬 맥주를 마시는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 레온에서 이틀 정도 머무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런 지 알 것 같은 하루였다. 대도시지만 알게 모르게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레온. 나중에 엄마 아빠와 함께 오면 하루 더 쉬면 좋을 것 같은 매력적인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