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의 일상_18. 템프라리오스->엘 부르고 라네로
17일 차: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프라리오스 -> 엘 부르고 라네로_06:30 ~ 13:00(31.7km)
4인실의 밤은 아저씨의 거대한 코골이 소리로 시끄러웠다. 하루 종일 걷기 때문에 잠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어서 안락한 방을 선호하는데 항상 복불복이다. 많은 사람이 함께 자도 조용히 잘 수 있을 때도 있고 적은 사람과 한 방에서 잘 때 코를 엄청나게 고는 사람을 만나면 한숨도 못 잘 때도 있다. 귀마개도 소용없었다. 결국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겨 나왔다. 다행히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예쁜 여명을 보면서 출발.
길을 걷다 마주치는 일출은 말로 표현이 안될 만큼 멋있다. 내가 언제 또다시 일찍 일어나서 일출을 맞이하면서 걸을 수 있을까. 해는 매일 뜨고 지는데 그 매일매일이 모두 다르다. 새삼스레 그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한참을 뒤돌아서서 일출을 보고 난 후 열심히 걸었다. 오랜만에 30km가 넘는 거리를 걷는 날. 오늘도 오후가 되면 날이 무더워질 거라 오전에 빠르게 걷고 너무 더워지는 오후 시간 전에 도착하고 싶었다. 걷다 보니 언덕 아랫집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영화 호빗에 나올 법한 풍경이었는데 실제로는 포도주를 저장하는 창고로 쓰인다고 한다.
오늘은 앞뒤로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부분 처음부터 같이 걷던 일행이 아니라면 혼자 걷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걷기 시작하고 일주일 정도까지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많고 다리가 아픈 사람들도 많아서 서로 부엔 까미노를 외치고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그런데 메세타를 걸으면서는 이미 걷는 거에 익숙해지기도 하고 혼자 조용히 걷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뭔가 외부로 발산되는 에너지보다는 내 안에 집중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멍~하게 걷고 또 걷는다. 도로 옆길을 따라 쭉. 드디어 도로에 레온 표지판이 보인다. 부르고스 이후에 만나는 대도시. 순례길에도 비석이 하나 있는데 팔렌시아 주가 끝났다는 표시라고 한다. 어느새 나바라, 리오하, 부르고스, 팔렌시아를 지나고 레온에 들어왔다.
사하군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성당에서 사진을 찍고 계신 두 할머니를 만났다.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드렸는데 프랑스에서 오신 분께서 한국을 다녀왔었다고 정말 아름다운 나라라고 얘기했다. 예전에도 하이킹을 좋아하는 미국 할아버지가 한국은 산이 많아서 좋았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고 왠지 기분이 좋았다. 확실히 외국 풍경과 우리나라 풍경이 꽤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바라보는 우리나라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지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사하군은 프랑스 길에서 딱 중간 지점에 자리 잡은 규모가 꽤 큰 도시였다. 그래서 살짝 길을 헤매기도 했지만 무사히 순례자들이 많이 있는 바를 찾아 쉴 수 있었다. 빵이 맛있어 보이는 카페였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가장 좋아한다는 빵은 역시 맛있었다.
사하군은 볼거리도 많은 종교적 의미가 큰 도시라고 한다. 나중에 이 도시에 대해 공부도 하고 하루쯤 머물러도 좋을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도시의 의미나 유래보다는 사하군을 빠져나가면 프랑스 길과 로마 길로 나뉜다는 사실에 길을 잘 찾아야만 한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카페에서 쉬던 길에서 자주 만났던 순례자에게도 물어보고 슈퍼에서도 물어보고 마을을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 알베르게에서도 물어봤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표시가 잘 되어있다고 얘기를 했다. 결국 길은 잘 찾았고 역시 미리 하는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란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느 길로 가도 결국 최종 목적지는 같으니까.
갈림길을 지나 걷는 길은 역시나 도로 옆을 따라가는 지루한 길이었다. 바람도 없고 너무 더웠지만 쨍한 날씨가 하늘이 꽃들이 예뻐 보였다. 앞뒤로 사람들도 많지 않아서 음악을 틀어놓고 정말 멍하게 걷고 또 걸었다.
길 위에 오래된 성당이 보여 들어가서 초 봉헌을 하고 가족들과 나를 위해, 함께 걷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마을 벤치에서 사하군에서 사 온 납작 복숭아를 먹었다. 유럽에 여행 가면 납작 복숭아를 꼭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매번 슈퍼나 과일 가게에 갈 때마다 찾았는데 올봄에 날씨가 추워서 수확인 늦어진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납작 복숭아를 사하군 작은 슈퍼에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이 날 이후로 납작 복숭아는 순례길 최애 과일이 됐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었지만 납작 복숭아의 힘으로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 알베르게를 찾기 시작했다. 대부분 공립 알베르게는 순례길 위에 있으니 화살표를 찾아서 마을을 지나가기 시작했는데 계속 걸어도 알베르게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동네 분들에게 물어 물어서 도착. 순례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알베르게라고 해서 기대가 컸다.
첫 느낌은 마치 허클베리 핀에 나올 법한 미국 남부의 나무집 느낌이랄까. 노란색 흙벽과 나무가 잘 어우러진 알베르게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지금까지 지냈던 알베르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일단 우리나라 사찰에서 느껴지는 향냄새가 났고 친절하게 맞아주는 호스피딸로와 웰컴 음료가 있었다. 공립 알베르게는 봉사하는 분들에 따라 분위기도 바뀐다고 했는데 여기는 남자 한 분과 여자 한 분이 호스피딸로로 계셨고 웃는 얼굴에 정말 친절한 분들이었다. 체크인을 하면 국적을 물어보는데 오늘 내가 7번째로 체크인하는 한국 사람이라며 럭키하다고 말했다. 길 위에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는데 알베르게는 거의 꽉 찼다. 침대를 배정받고 알베르게 설명을 듣는데 저녁에 다 함께 일몰을 보러 가는 서프라이즈 이벤트가 있다고 했다. 장난 어린 미소를 지으며 정말 좋을 거라고 말해서 기대가 됐다.
낡고 오래됐지만 공립 특유의 따뜻함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다만 베드 버그가 나올 법한 나무 침대와 서까래가 무서워서 스프레이를 엄청 뿌렸다. 씻고 휴게 공간에서 쉬고 있을 때 까리온에 들어갈 때 만났던 한국 분을 만났다. 이 마을에 신라면을 끓여서 파는 가게가 있다며 라면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라고 말하며 어제 우리가 묵었던 마을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어서 다른 한국 분 몇 분과 택시를 타고 사하군으로 이동했다고 했다. 길 위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진 않는데 역시 성수기에 접어들고 있어서 그런 지 간혹 알베르게에 침대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나 보다. 사리아부터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진다고 하던데 걱정이 됐다. 미리 걱정해봤자니까 빠르게 씻고 빨래 맡기고 라면집을 찾으러 나갔다. 한국에서도 자주 먹진 않지만 아무래도 해외에 나오면 더 먹고 싶어지는 게 라면이니까.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알베르게 앞 바에서 콜라와 초콜릿 빵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늦은 오후의 강한 햇살을 받고 있는 알베르게가 참 예뻤다. 간단하게 주방에서 저녁을 할 때 히피 커플을 만났다. 큰 강아지와 함께 순례를 하는 커플이었는데 순례길이 아니었다면 노숙자라고 생각할만했다. 아마도 여유롭지 못한 금액으로 순례를 하다 보니 대부분 기부제 알베르게나 공립 알베르게에 근처에 텐트를 치고 지내고 공동 식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서 식사를 하면서 순례를 하는 것 같았다. 아무 준비 없이 어느 날 길을 걷고 싶고 떠나고 싶어 훌쩍 떠나온 듯하고 굉장히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그에 반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 갖고 온 내가 준비성이 철저하다는 느낌보다는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선 많은 게 필요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다 함께 일몰을 보러 가는 시간. 알베르게에서 쭉 걸어 나오면 작은 동네 공원에 운동기구가 있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이 명당이라고 했다. 그리고 역시나 서프라이즈 이벤트답게 인생에서 손꼽힐만한 일몰을 보게 됐다.
오늘은 새벽 여명부터 노을까지 정말 아름다운 자연을 만난 날이었다. 오랜만에 3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걷는 걸 좋아하는 내가 정말 원 없이 걸었다란 생각에 웃음이 났다. 그저 오늘은 혼자 걸어도 혼자 걷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냥 즐겁게 걸었던 날이라고 기억될 날. 따뜻한 색감과 기분 좋은 향으로 기억될 순례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알베르게에 머무는 오늘, 이 여유로움이 따뜻함이 참 좋다. 다 함께 노을을 보러 갈 때 한국에서 온 모녀를 만났는데 나도 언젠가 엄마, 아빠랑 같이 와서 아름다운 노을을 함께 보고 싶다. 행복한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