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 않아 행복한 하루

2018년 5월의 일상_17. 까리온->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프라리오스

by 에이치영

16일 차: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 ->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프라리오스_06:30 ~ 13:00(25.8km)

어제 느꼈던 따뜻함 때문인지 아주 푹 잘 잤다. 어제 체크인할 때 오늘 아침에 문은 6시 30분에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는 천천히 짐을 챙기고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출발 시간이 있는데 새벽같이 출발해서 일찍 도착하고자 하는 사람, 일찍 출발해서 천천히 걷는 사람, 늦게 일어나서 빠르게 걷는 사람 등 각자 자기 상황에 맞게 걷는다. 지난번 일출을 보면서 걷게 된 이후부터 나 역시 알베르게에서 가장 빠르게 출발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오늘은 6시 30분에 문이 열린다고 해서 천천히 짐을 챙기고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어제는 알베르게에서 다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있어서 마을을 둘러보진 못했는데 아침에 마을을 빠져나가면서 보니까 굉장히 예쁜 마을이었다. 천천히 여유 있게 마을을 둘러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마을을 빠져나가면서 어제 아리랑을 함께 부른 친구를 만났다. 그는 다리가 아파서 까리온에 이틀을 머물렀는데 조금 나아져서 천천히 걸어가 보겠다고 했다. 특히 필름 카메라를 갖고 다녔는데 배낭도 무거울 텐데 카메라에 필름까지 챙겨 다니다니... 힘들어 보였지만 필름 사진 특유의 색감이나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 역시 그가 찍은 사진이 기대됐다. 잠시 길을 함께 걷고 있을 때 등 뒤로 해가 떠올라서 둘 다 사진을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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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까리온부터 다음 마을까지 17km 동안 아무것도 없는 구간이 시작이다. 약 4시간 정도는 먹을 곳과 화장실이 없단 얘기다. 그래서 어제 미리 마트에 가서 초코 우유와 에너지바, 간식들을 잔뜩 가서 배낭이 무거웠다. 그래도 몸이 적응했는지 큰 문제없이 걸을 수 있었다. 길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이런 길에 항상 있게 마련인 오아시스도 있는데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쭉 뻗은 길을 따라 걸었다. 앞에 걷던 분이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고 걸어서 뒤를 따라 걸으며 잠시 동안 신나는 음악을 함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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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뻗은 길을 걸으면 무념무상. 그저 다음 마을이 언제 나올까란 생각뿐이다. 일정의 절반이 지나면서 걸음이 빨라지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도 빨라지고 있다. 몸이 잘 적응했다는 증거다. 그런데 마음은 길을 걷는 내내 행복하다가도 가끔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란 생각이 든다. 이 길을 걷는 나는 무엇을 찾기 위해 온 걸까? 이 길이 끝나도 답을 찾지 못할 거 같다는 불안감도 들고. 몸은 적응했지만 마음은 아직도 갈팡질팡이다. 언젠가 끝이 있을 거란 걸 알고 시작했지만 막상 초반의 설렘이 사라지고 끝은 다가오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이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여러 번 반복할 때 드디어 마을이 보였다. 마을 초입 눈에 보이는 바에 들어가서 수박과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오렌지 주스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제일 싱거워서 별로였지만 처음 먹는 수박은 시원하고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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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오늘 목적지인 템플라리오스까지 가는 길은 도로 옆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차가 많이 다니지는 않지만 도로 옆길은 굉장히 무료하다.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한국에서 오신 할아버지를 만나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지금까지 만난 한국 분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는데 배낭은 동키로 보내고 가볍게 걷긴 하셨지만 체력이 엄청 좋으셔서 지금까지 크게 아프신 곳 없이 걷고 계신다고 했다. 나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저렇게 건강하게 새로운 것을 겁내지 않고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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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고스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오늘 묵기로 한 알베르게가 나왔다. 정말 바로 도로 옆에 자리한 알베르게인데 잔디밭이 크고 안에 시설도 깔끔했다. 오늘은 4인실을 사용하기로 했다. 방에 샤워시설이 있는 화장실이 함께 있는 구조였는데 내가 제일 먼저 체크인해서 빠르게 씻고 나왔다. 빨래는 잔디밭 뒤편에 있는 수도 시설을 이용했는데 볕이 좋아서 빠르게 말릴 수 있었다. 빨래까지 마치고 난 뒤에 처음으로 맥주를 한 잔 시켰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로 콜라를 마시는데 다들 샤워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정말 피곤함까지 사라지게 해 준다는 얘기를 많이 해서 도전해봤다. 환할 때 마신 술이어서 그런 지 빠르게 취기가 올라왔다. 딱 낮잠을 자면 좋을 것 같은 기분. 근데 낮잠을 자면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잔디밭에 앉아 쉬기로 했다. 뭉게구름이 정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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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는 정말 작고 볼 게 없었다. 한가하게 로비에 앉아 인터넷을 하면서 내일 어디에 묵으면 좋을지를 찾아봤다. 이틀 동안 약 70km를 걸어야 레온에 도착할 수 있다. 중간중간 마을이 많지는 않아서 살짝 고민을 하다가 순례길 위에서 아름다운 알베르게 중 하나라는 라네로 공립 알베르게에 가보기로 했다. 사실 간지러운 걸 못 참는 편이라 베드 버그가 무서워서 주로 사립 알베르게에 머무르려고 하는 편이다. 공립 알베르게는 잘 관리를 한다고 해도 나무 침대가 많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잘 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알베르게가 모두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였다. 그라뇬과 까리온 알베르게. 내일도 아름다운 알베르게에서 좋은 인연과 추억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순례자 메뉴로 저녁을 먹고 노을을 보러 잔디밭으로 다시 나갔다. 온타나스에서 멋진 일몰을 감상한 뒤부터 생긴 하루를 마무리하는 혼자만의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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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일출과 일몰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어서 좋다. 오늘은 특별하진 않았지만 까리온에서 받은 별의 희망과 넬리가 준 네 잎 클로버의 행운과 길을 걷는 단순한 행복이 함께해서 행복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