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Bless You"

2018년 5월의 일상_16. 보아디야 델 까미노->까리온 데 로스콘데스

by 에이치영

15일 차: 보아디야 델 까미노 ->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_06:00 ~ 12:10(25km)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 잠에서 깼다. 조용히 침낭에 모든 짐을 넣어 공용 공간으로 나와 짐을 챙겼다. 아직 캄캄한 바깥은 별들로 가득했다. 언젠가 더 일찍 일어나서 별을 보면서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출발 준비를 마치고 대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이 안 열렸다. 혹시나 식당 쪽 문이 열렸나 싶어서 가보았는데 거기도 문이 잠겨있다.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마침 아침을 준비하러 출근한 분이 오셔서 대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다. 밖은 여전히 캄캄했다. 어제저녁을 먹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을 미리 확인해둬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을 밖으로 나오니 정말 어둠 속이었다. 준비해 간 랜턴을 켜고 이리저리 비추며 길을 찾았다. 특히나 갈림길이 나왔을 땐 화살표를 잘 찾아야 길을 잃지 않기 때문에 더욱 주의 깊게 살펴봤다. 하지만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아 결국 구글맵으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방향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길을 혼자 걸으니 무서웠다. 그런데 또 혼자여서 좋았다. 어둠과 밝음, 무서움과 편안함, 혼자인 여유로움과 외로움.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드디어 하늘이 조금씩 밝아졌다. 프로미스타로 가는 길은 운하를 옆에 끼고 가는 길이라 물에 비친 빛을 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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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일출을 보고 싶어서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지금 이 순간 이 길이, 풍경이 모두 내 것인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한 시간을 걸어서 프로미스타에 도착했다. 이제 막 아침을 먹고 길을 출발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새벽에 혼자 걸으며 마음이 많이 안정됐던 걸까. 갑자기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그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외국 사람들 속에 나 혼자 있어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은 인종, 국적은 달라도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큰 그룹에 속해있다는, 순례자라는 소속감을 느꼈다. 갑자기 외로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시 행복이 들어왔다. 걷는다는 단순한 즐거움. 아름다운 자연.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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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한국 남자분을 만났다. 어제 한국어를 쓰지 못했던 걸 풀기라도 하듯 그분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가장 흔한 대화 주제인 왜 이 길을 걷게 됐는지, 외국 사람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 등 나를 처음 만났으니 이전의 나를 모르기 때문에 쉽게 나를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순례길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오히려 깊은 고민과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 그리고 길을 걷는 사람 대부분이 속도보다는 방향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지 잘 들어주고 섣부르게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까리온으로 향하는 길은 도로 옆 길을 따라가는 길이라 자칫하면 지루하고 힘든 길인데 동행이 있으니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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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쉬지 않고 걸어서 까리온 전 마지막 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잠시 쉬어가야 할 거 같아서 마을 초입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바가 있을 것 같은 마을 광장까지 들어왔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에서 바를 발견하고 잠시 쉬었다. 그런데 결국 그 바 앞에서 같이 걷던 분과 외국 분을 만나게 됐다. 외국 분이 이 마을에 템플 기사단이 운영하던 성당이 있다고 했다. 오늘은 거리도 시간도 여유가 있어서 잠시 둘러보고 출발하기로 했다. 성당에 도착하니 일본인 코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거의 5일 만에 만나는 거라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동안 발이 아파서 천천히 걸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지금까지 같이 걸었던 한국 분과도 초반부터 함께 걷던 아는 사이. 오랜만에 만난 두 분은 좀 더 쉬다가 출발하겠다고 해서 나는 먼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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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성당이라고 하는데 공부를 좀 하고 올걸 그랬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까리온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도로 옆을 따라가는 길이어서 혼자 걸으니 조금은 지루했다. 무거운 배낭을 다음 목적지까지 배달해주는 걸 동키 서비스라고 부르는데 내 앞에서 진짜 동키가 배낭을 날라주는 걸 봤다. 너무 귀엽고 신기해서 빠르게 쫓아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고는 사진을 찍었다. 배낭을 맡긴 아저씨는 동키 수레에 자신의 배낭이 있다고 얘기하며 아주 편안하게 동키 걸음에 맞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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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까리온에 도착했다. 알베르게가 열기 전에 도착해서 배낭과 함께 줄을 서있었다. 까리온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유명하다. 하나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노래하는 수녀님이 계신 산타 마리아 알베르게이고 다른 하나는 침대가 모두 1층인 베네딕토회 수녀님들이 운영하시는 알베르게이다. 오늘은 부르고스에서 쉬던 K 군이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오기로 해서 수녀님이 운영하시는 알베르게에 가자고 얘기를 했는데 K 군은 베네딕토회 수녀님들이 운영하시는 알베르게에 이미 체크인했다고 했다. 깔끔하고 시설도 좋다고 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산타 마리아 알베르게에 묵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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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침대를 배정받고 빠르게 씻고 나서 K 군을 만나 식사를 하러 갔다. 3일 만에 K 군을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 성당 앞 광장에서는 장이 열렸었는데 시에스타 시간이 다가오니까 다들 정리하는 분위기였다. 읽고 있던 블로그에서 소시지가 들어간 밥 요리가 있다고 해서 열심히 사진을 분석해가며 식당을 찾았는데 그 요리는 안 한다고 했다. 그래서 괜찮아 보이는 바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 알베르게는 그라뇬에서 했던 것처럼 5시 30분에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그때보단 좀 더 밝은 분위기랄까. 꼭 참여해보고 싶어서 시간 맞춰 알베르게 로비로 내려갔다. 수녀님께서는 마음속에 담아 가라며 정중히 사진과 영상을 거절하셨다. 수녀님은 악기가 있는 사람은 가지고 내려와서 함께 연주하자고 청하셨고 코지는 우쿨렐레를 가지고 내려왔다. 수녀님 기타에 맞춰 다 같이 몇 곡을 노래했다. 순례자들에게 몇 곡을 청하기도 했는데 코지가 수녀님 기타를 빌려 멋지게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을 선곡하기도 하고 각자 나라 언어로 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다리가 아파서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게 된 한국인 순례자가 수녀님께 어제처럼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수녀님께서는 그분과 나에게 함께 불러달라고 얘기하셨고 우리 셋은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이번에도 역시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순례자들 덕분에 무사히 1절을 다 부를 수 있었다. 외국 사람들 앞에서 아리랑을 부르다니 색다른 경험이었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만난 프랑스 분들이 스파게티를 만들 거라며 초대해주셨다. 두 분은 작년에 프랑스에서 생장까지 걷는 길에서 만났는데 올해 함께 길을 걷자고 약속을 해서 지금 함께 걷고 있다고 했다. 한 분은 영어를 아예 못하시고 다른 한 분이 통역해주시면서 얘기를 나눴는데 사실 말이 많이 필요하진 않았다. 오늘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난 썬 군과 피자를 데우던 이탈리아 친구와 한 테이블에 앉아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다. 이곳 성당에 7시 30분 미사가 있어서 나는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먼저 일어나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과 얘기도 나누며 더 알아가고 싶었지만 왠지 오늘은 꼭 미사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로스 아르코스 이후로는 한 번도 미사를 본 적이 없었다. 미사를 보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온타나스에서 만났던 하와이 부부도 있어서 반갑게 인사했다. 미사가 시작되고 성가를 부르는 아름다운 수녀님 목소리가 성당에 울려 퍼졌다. 정말 아름다웠다. 미사가 끝나고 순례자들을 위해 수녀님들께서 직접 만드신 별을 주시면서 모든 사람에게 강복해주셨다. "GOD bless you"라고 말씀하시고 이마에 성호를 그어주셨는데 진심으로 축복받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제부터 힘들었던 마음과 외로움이 한 번에 사르륵 사라지는 느낌. 사람들 속에서 느낀 힘듦과 외로움이 결국 사람으로 인해 사라지고 마음속에 온기가 가득 차는 기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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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서 아래층 침대는 영어를 하시는 프랑스 분이, 문 바로 옆 1층 침대에는 영어를 못하시는 프랑스 분이 계셨다. 미사는 어땠냐고 묻는 그분들께 그냥 정말 좋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가 정말 맛있었다고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다. 그때 영어를 못하시는 프랑스 분께서 내게 선물을 줬다. 집에서 찾은 네 잎 클로버와 까미노를 걷는 도중 찾은 네 잎 클로버였다. 집에서 찾은 네 잎 클로버는 찾은 날짜를 적은 종이와 함께 잘 코팅되어 있었고 까미노를 걷는 도중 찾은 네 잎 클로버는 책 속에 잘 말려있었다. 그녀는 직접 내 핸드폰 케이스에 코팅된 네 잎 클로버를 넣어줬다. 최고의 선물이었다. 말이 통하진 않았지만 너무나 친절하고 즐겁게 다가와 주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준 그분들. 두 분은 내일 사하군까지 약 40km를 간다고 했다. 새벽에 만나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후 길에서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가셨겠지? 그날 밤 메일 주소를 적어달래서 메일을 보내봤지만 자꾸 메일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만 왔다. 지금까지도 너무 아쉽다.



오늘은 정말 치유의 날인 가보다. 어제 힘들었던 걸 모두 보상받은 하루. 감사한 하루. 글로 표현이 안 되는 내 마음.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속에 박혀있는 따뜻한 마음들. 까리온은 순례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마을이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별과 네 잎 클로버를 가지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