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의 일상_14. 부르고스->온타나스
13일 차: 부르고스 -> 온타나스_06:50 - 14:25(31.5km)
간밤에는 정말 푹 잤다. 코 고는 소리도 없고 새벽에 화장실을 가는 사람도 없고. 가끔은 이런 시간이 필요하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의 도시 역시 한적하다.
부르고스를 빠져나갈 때부터 다음 마을까지 이탈리아 아부지 오라치오 부부가 앞에서 길을 이끌어주었다. 역시나 천천히 가시는 거 같은데도 어느덧 저 멀리 앞서가신다. 다른 사람이 간 길을 쫓아가는 건 쉽다. 화살표를 확인하지 않아도 앞사람만 따라가면 된다. 그러다가 가끔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내가 앞서게 되면 책임감이 생긴다. 뒷사람을 잘 인도하겠다는 책임감. 화살표를 잘 찾아보려고 하고 가끔 뒤를 돌아보며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한다. 가족도 아빠 엄마가 가정이라는 길을 찾아가려면 무수한 책임감이 따르듯이. 갑자기 새삼 부모님도 오늘을 처음 살아가는 건데 너무 큰 책임감과 짐을 짊어지고 가시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르고스에서부터 아스트로가까지는 평원을 지나는 수월한 구간이다. 중간중간 마을이 띄엄띄엄 있기 때문에 하루 일정을 잘 짜는 게 중요하다. 가이드 책 일정인 34일을 30일로 줄여야 하기에 이제부터 조금씩 더 걷을 예정이다. 그래서 오늘은 30km 정도 떨어진 온타나스까지 갈 예정이다. 아침부터 해가 쨍하게 나서 기분이 좋았다.
언덕길을 따라 걷고 주택 단지를 지나 화살표를 따라가다가 순례객들이 나오는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성당 앞에는 각 나라 언어로 된 안내서가 있었다. 한국어로 된 안내문도 있었는데 '기적의 메달의 성모 성당'이라고 적혀있었다. 안에서 할머니 한 분이 세요를 찍어주시고 스페인어로 말씀하시더니 성모님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셨다. 그리고 또 한참을 스페인어로 말씀하시고는 서양식 볼 뽀뽀로 인사해주셨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사히 순례길을 마치라고 기도해주신 게 아닐까? 할머니는 매일매일 이곳에 나와 사탕도 준비해두시고 안내 종이도 채우고 성당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해주신다. 나중에 온타나스 알베르게에서 토마스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할머니께서 100세가 넘으신다고 했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언제부터 이곳에 나오셔서 순례객들을 만나셨는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한자리에서 매일 모르는 사람에게 진심 어린 기도를 해주시다니. 믿음으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가능한 일이다. 평지의 끝도 없는 길이 지치게 만들어서 음악과 계속 함께 걸어왔는데 할머니 덕분에 잠시 음악을 끄고 온전히 걷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제 푹 자서인지 컨디션도 좋고 날씨까지 좋아서 평상시보다 빠르게 걸었다.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과 초록색 밭, 지평선. 한국과는 다른 뻥 뚫린 풍경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길을 걷다 보면 표지판이나 터널 등에 낙서를 많이 하기도 하는데 정신을 확 깨우고 공감하게 하는 글귀들도 많다. 그리고 점점 돌탑들도 많이 보이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길을 가다가 작은 돌을 주워 올려놓으며 무사히 길을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늘 하나 없는 길, 길 옆 밭들도 제외는 아닌데 가끔 밭 한가운데 홀로 서있는 나무들이 있다. 일하는 분들을 위해 심은 건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자라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혼자 있는 나무는 참 심심하겠다 싶었다.
그늘이 없으니 쉴 곳도 없었는데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그래도 한 시간은 족히 걸어가야 할 거리겠지만. 마을에 가까워질 때 '사운드 오브 뮤직' 오프닝 장면에서 나오는 듯한 종소리가 들렸다. 멀리 울려 퍼지는 종소리.
종소리를 따라 마을로 들어서니 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알베르게가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꽤 유명한 알베르게라고. 종소리를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오늘 무슨 행사가 있는 날인 가보다. 성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신부님도 나오시는 걸 보니 성당과 관련한 축제인가 보다.
이것 때문에 성당에서 계속 종을 치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성당 앞 바에서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식사류는 되지 않는다고 해서 오렌지주스 한 잔만 마시며 잠시 쉬었다. 성당 앞 광장에 수탉 동상이 있는데 산토도밍고처럼 뭔가 닭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 마을인 것 같았다. 이곳에서 오며 가며 얼굴만 알고 있던 한국 청년을 만나 인사를 했는데 로리가 말했던 한국인 아들 '썬'이었다. 이름 중에 '선'이 들어가서 외국인들에겐 '썬'이라고 불리는 친구였는데 더 걸을 생각인지 행렬을 구경하다가 먼저 출발했다.
순례자는 배낭에 조개껍질을 달고 다니는데 자꾸 조개가 배낭 버클에 부딪혀서 달그락 소리가 나곤 해서 예쁘게 배낭 정면에 다시 달고 출발했다. 확실히 오후 1시가 지나고 나면 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조용히 혼자 걷기엔 참 좋다. 온타나스까진 바람과 동행하며 걸었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바람이 꽤 불었고 어김없이 풍력발전기도 많이 보였다.
길을 걷다 보면 두 명이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 나온다.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얘기도 할 수 있는... 사람 사이에는 이렇게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그 적정한 선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래야 나도 타인도 행복할 수 있다.
산볼은 마을이 아니라 정말 알베르게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다. 게다가 길에서도 어느 정도 떨어져 들어가야 나오는 곳인데 전기도 없어서 자연을 그대로 만끽하기엔 좋은 장소라고 한다. 정원 수가 적기 때문에 꼭 예약을 하고 방문하거나 일찍 도착해야 한다고 한다. 바람은 거세고 사람도 없는 뜨거운 길을 혼자 걷는다는 건 좋기도 하지만 지치기도 한다. 특히나 점심을 제대로 못 먹었을 땐 말이다. 문제는 산볼을 지나 걷고 또 걸어도 온타나스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메세타에서는 마을이 보여도 기본 한 시간은 가야 할 만큼 가시거리가 좋은데 온타나스는 보이지도 않으니 애가 탄다. 날은 덥고 물은 떨어져 가고.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라며 끝없이 펼쳐진 고원의 평지길에서 내리막이 시작될 때 마을이 보인다. 게다가 내리막만 내려가면 마을이다. 정말 반가운 마을, 온타나스다.
온타나스는 산으로 폭 둘러싸인 작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오랜만에 30km를 걸었더니 너무 힘들었다. 미리 검색해둔 마을 초입에 바와 알베르게를 겸하는 곳에 체크인했다. 한 방에 6명이 쓰고 화장실이 있다. 샤워실은 따로 있는데 부스가 한 칸이지만 깨끗하고 뜨거운 물도 잘 나왔다. 다만 세탁 서비스는 되지 않아서 손빨래를 해서 밖에 널어야 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마을도 정말 예뻤다. 샤워를 하고 마을을 둘러보러 나갔는데 정말 작은 마을이라 10분이면 동네 한 바퀴를 할 수 있었다. 성당도 아기자기하고 여러 나라 성경 책 중에 한국어로 된 책도 있었다. 초를 켤 수 있는 예쁜 장소가 있길래 헌금을 하고 초를 켜서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부모님과 함께 꼭 이 길을 다시 올 수 있기를... 무사히 이 길을 마칠 수 있기를... 순례자 길이고 작은 마을이라도 성당이 꼭 중심가에 있어서 길을 잃고 다시 찾을 때면 성당으로 가면 된다. 그러다 보니 길을 걷는 순간에는 신앙까지는 아니지만 기도하고 찾게 된다. 나만의 신을, 믿음을.
작은 마을을 둘러보고 밖에 테라스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성당 종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마을에 들어갈 때, 도착해서 쉬고 있을 때 종소리를 듣게 됐다. 마치 이곳에 잘 왔다고 오늘도 무사히 잘 걸어왔다고 환영해주는 소리 같다.
잠시 테라스에 머물며 쉬다가 저녁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갔다. 이곳은 바와 레스토랑도 겸하고 있어서 순례자 메뉴를 신청할 수 있다. 다만 개별 주문으로 먹는 순례자 메뉴가 아니라 딱 12명만 신청받아서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저녁 식사는 정말 훌륭했다. 메인 메뉴로 빠에야가 나왔는데 양도 푸짐하고 정말 맛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슬고슬한 볶음밥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12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먹었는데 다양한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즐거운 식사시간을 마치고 널어두었던 빨래를 걷으러 나갔을 때 정말 아름다운 석양을 봤다. 밤 9시인데도 해가 지지 않아서 노을을 만나기가 힘들었는데 이런 행운이 있을 줄이야. 말 그대로 넋을 잃고 바라봤다.
오늘 하루는 산볼부터 남은 5km가 힘들었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벽했다. 출발할 때부터 컨디션도 좋았고 길도 어렵지 않았고 할머니의 진심 어린 기도도 받았고 더 이상 갈 힘이 남지 않아 지쳤을 때 짠하고 나타난 목적지, 평화로운 풍경, 한산한 마을, 맛있는 저녁, 선물 같은 노을까지.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례길 마을 베스트 3에 들 만큼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 하루만 머물다가 가서 그럴 수도 있지만 참 행복하고 완벽한 하루다. 하루하루 행복한 것. 뭔가를 이루지 않아도 찾지 못해도 지금은 그거면 됐다. 내일부터 삼일 거리를 이틀에 나눠서 간다. 가이드 책 일정보다 하루 더 당기기. 점점 하루하루씩 줄여간다. 지금까지 잘해왔듯이 아프지 말고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