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의 일상_15. 온타나스->보아디야 델 까미노
14일 차: 온타나스 -> 보아디야 델 까미노_06:30 ~ 13:45(26km)
2층에서 잤지만 정말 푹 자고 일어났다. 작은방에서 여러 명이 자다 보면 이것저것 신경 쓰여서 잘 못 잘 때도 있는데 최근엔 정말 숙면이다. 언제나 그렇듯 침낭에 짐을 가득 들고 나와 주방에서 짐을 챙기고 있는데 부르고스로 가던 날 만났던 하와이에서 온 한국인 부부 역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데이비드와 클라우디아 부부는 나와 산티아고에 들어가는 날짜가 같았다. 처음으로 일정이 맞는 사람을 만났다며 반갑게 얘기를 나누며 부부가 준 커피와 요거트를 먹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한국 믹스 커피는 역시 맛있었다.
요즘 대부분 5시 내외로 일어나서 6시 30분~40분쯤 걷기 시작한다. 곧 순례자들을 많이 만나지만 이때가 가장 고요하게 걸을 수 있는 시간이다. 이른 오전과 점심 직후 시간 그리고 2시가 넘어선 오후 시간이 붐비지 않고 조용히 일렬로 걸어갈 수 있어서 좋다. 오늘 아침 역시 일찍 일어나서 걷다 보니 예쁜 보라색 하늘과 일출을 만날 수 있었다.
둥근 해가 눈에 보이기 전,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 며칠 동안 여명이 뜨면서 살짝 밝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해서 운 좋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을 담고 싶어서 계속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게 된다. 어둠과 밝음, 해와 달, 어둠이 무서울 때 해가 뜨면 무서움을 쫓아주고 따뜻함을 준다. 밝음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내가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 행복을 느낀다.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볼 수 있다는 것에, 느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온타나스를 품고 있던 분지를 빠져나오면 한적한 도로를 따라 걷게 된다. 이제는 건물만 남게 된 산안톤 수도원을 지나면 첫 마을, 카스트로헤리츠가 보인다.
눈에 마을이 보여도 족히 한 시간을 걸어가야 한다. 아침에 온타나스 알베르게에서 믹스 커피 한 잔과 요거트만 먹고 출발했기에 배가 많이 고팠다. 마을 초입에 있는 바에 들어가서 카페 콘 레체와 오렌지 주스, 토스트를 주는 아침 세트를 주문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마을엔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어서 저녁엔 비빔밥을 준다고 한다.
마을을 빠져나와 걸으면 곧 오르막 언덕을 만나게 된다. 단단한 흙으로 쌓인 언덕 같아 보였는데 거칠고 메마른 느낌이었다. 언덕을 오르기 직전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토마스를 만나 언덕을 함께 오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고도가 높은 지역이라 그런지 풍력발전기가 많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돈키호테'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토마스는 순례길을 가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니까 미쳤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무거운 배낭을 메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는 우리도 돈키호테 같은 이상하고 미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부른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는 얘기도.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올랐다. 우리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놀라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처음 만난 날도 느꼈지만 그는 걸음이 빠르다. 내가 잠시 쉬겠다고 하면 정말 순식간에 앞서 나간다. 그런 사람이 나와 함께 걸을 때 느린 내 걸음에 맞춰 걸어주었다는 게 정말 고마웠다. 오늘 언덕을 토마스 때문에 힘들지 않게 올라왔다. 혼자 올라갔으면 쉽게 지쳤을 텐데 누군가와 함께 걸으니 아픔과 힘듦을 잊게 만든다. 혼자 걷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함께 걷는 것 역시 행복한 일이다.
오르막을 올랐으면 내리막이 나오는 법.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저 멀리까지 보였다. 직선이 아니라 밭을 따라 구불구불 나있는 길이 멋졌다. 돌아가더라도 더 여유 있게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길.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고속도로보다는 국도를 선호했다. 아빠 역시 쭉 뻗어있는 도로보다는 구불구불하고 주변 경치가 멋진 국도를 더 좋아하셨다. 요즘엔 내비게이션을 따라가지만 예전에 지도를 보며 길을 찾고 깨끗하고 큰 휴게소보다 도로 옆에서 파는 옥수수와 복숭아가 더 맛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리막 이후부터는 메세타 답게 끝없이 이어진 평지를 걸었다. 나무 하나 없는 길, 양옆에는 밀밭, 푸른 하늘, 바람. 뜨거운 햇살에 정말 무아지경으로 걷기만 했다.
무작정 걷다 보니 내가 지금 어디쯤 인지도 몰랐다. 메세타 지역은 마을이 띄엄띄엄 있기 때문에 마을이 보일 때마다 쉬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정신을 놓고 걸어서인지 빨리 도착해서 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그래서 마지막 마을 초입에 있는 바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서 길을 걸으며 먹었다. 아무래도 혼자 걸으니까 쉬는 시간을 지키는 게 어렵다. 물론 이제 적응이 돼서 물집도 거의 생기지 않기도 하고.
계속 같은 풍경인 것 같지만 미묘하게 달라지는 모습들, 뻥 뚫린 시야가 매 순간 새롭게 느껴진다. 끝없는 밀밭이 끝나고 멀리 작게 보이는 마을, 드디어 보아디야 델 까미노에 도착했다. 블로그에서 봤던 수영장이 딸린 알베르게로 향했다. 그곳은 잘 꾸며진 정원이 있는 알베르게였다. 사실 오늘 프로미스타까지 가보려고 생각했는데 알베르게가 별로라는 얘기들도 많고 괜찮다는 곳은 예약이 필요했다. 데이터만 가능한 내 전화로는 가능하지 않아서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예약을 부탁해보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곳에도 정말 많은 순례자가 있어서 주인이 정말 바빠 보였다. 내 차례를 기다렸다가 전화를 걸어줄 수 있는지 물어보니 자신은 핸드폰은 없고 알베르게 유선 전화만 있는데 예약 전화가 계속 걸려와서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도움을 거절당해본 적이 없어서 순간 당황했지만 이렇게 된 거 그냥 이 알베르게 머물기로 했다. 알베르게는 도미토리는 별로였지만 햇살이 좋았고 작은 마을이어서 레스토랑은 없어서 순례자 메뉴를 먹어야만 했다.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으니 배고픔보단 샤워가 먼저. 씻고 간단히 케이크와 콜라를 시켜서 먹었다.
요기를 하고 나서 정원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쉬고 있었다. 해를 즐기는 사람, 스트레칭하는 사람, 책 읽는 사람 등 여유 있는 오후 시간이다. 나는 사실 가만히 멍하게 있는 걸 어려워하는 편이다. 지금까지도 항상 바빴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걷고 씻고 스트레칭하고 마을을 둘러보고 저녁을 먹으면 잘 시간이었다. 근데 오늘은 마을도 작아서 10분이면 동네 한 바퀴를 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너무 한적한 기분이랄까.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수영장에 물도 없어서 발도 못 담그고. 책이라도 한 권 챙길 걸 그랬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오후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먹었다. 레스토랑이 없는 곳이라 이 알베르게에 묵는 사람들이 거의 다 식사를 하러 온 것 같았다. 메인 요리인 닭다리가 조금 느끼했지만 식사는 괜찮았다. 아니면 내 기분이 별로여서 식사를 즐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알베르게엔 한국 사람이 나 혼자다. K 군과 부르고스에서 떨어진 이후 온타나스 알베르게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많이 만났는데 다들 프로미스타로 간 걸까? 혼자 있는 걸 즐기는 편이지만 한국에서 혼자 있는 것과 이곳에서 혼자 있는 건 많이 다른 것 같다. 뭔가 소외당하는 느낌이다. 함께 즐기지 못하는 기분. 외국어만 들리는 곳에서 혼자 있는 건 정말이지 외롭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 온타나스에서 떠난 이후에 한국어를 한 번도 안 썼다. 그동안은 혼자 걸었어도 알베르게에서 K 군도 만나고 한국 분들을 만나 얘기도 나눠서 그런 지 외롭다는 느낌이 없었다. 근데 오늘은 정말 외롭다는 기분이 든다. 외국인 중에도 익숙한 얼굴들도 없다. 대부분 일정이 비슷하면 같은 알베르게에 많이 머무는데... 옆에 앉은 네덜란드 사람이 네가 오늘은 스페셜 한 사람이라고 얘기해준다. 만약 순례길이 아닌 외국이었으면 어땠을까? 다들 하루 머물고 떠나는 게 아닌 그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에 내가 혼자 있다면 많이 외롭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분명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끝은 불편하고 외롭다. 다리가 아팠을 때도 감정적으로 힘들긴 했어도 오늘처럼 힘들진 않았다. 내일은 좀 더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해야겠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매일매일이 행복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기분도 저런 기분도 다 느낄 수 있는 곳이니까.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