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의 일상_13. 아타푸에르카->부르고스
12일 차: 아타푸에르카 -> 부르고스_06:50 ~ 12:45(21.5km)
오늘은 두 번째로 만나는 큰 도시, 부르고스에 가는 날이다. 어제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길에서부터 비가 내리더니 아침에도 역시 날이 흐렸다. 입고 있는 등산복이 방수가 되는 거라서 약하게 내리는 비는 막아주니 배낭에 레인 커버만 씌우고 길을 나섰다. 사실 처음엔 비가 오면 날이 어둡기도 하고 혼자 여행을 떠나니까 멀리 서라도 날 알아볼 수 있는 주황색 우비를 샀는데 너무 튀는 색이라 살짝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올 때만 입는 걸로... 오늘도 역시 마을을 나서자마자 살짝 높은 언덕을 올라갔는데 비도 오고 돌멩이들이 많아서 많이 미끄러웠다.
올라가는 길에 양 목장이 있었다. 양들은 귀여웠지만 역시 축사 냄새가 났다.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양 두 마리를 보면서 이 친구들은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집 앞을 지나면서 사진을 찍고 귀엽다고 말을 걸고 풀을 뜯어서 주는 걸 귀찮아하지는 않을까?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자기들끼리 지나가는 순례객들 숫자를 세고 패션에 대해 평가를 하진 않을까? 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열심히 걸을까란 생각도 하고 따라서 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진 않을까?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양 두 마리가 나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눈앞에 있는 언덕을 오르니 돌무더기 위에 나무로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순례길답게 걷는 곳곳에 십자가가 많이 세워져 있다. 길 위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십자가도 있고 길을 걸으며 십자가로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고 상징성을 갖고 있는 십자가도 있다. 이곳은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좀 더 많이 알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신기한 건 서양도 무언가를 빌 때 돌멩이를 올려놓는다는 점이다. 표지석 위나 이렇게 십자가 밑 돌무더기에 올려놓거나. 아니면 올라올 때 돌멩이가 많아 힘드니까 다음 사람을 위해 하나씩 들고 와서 올려놓는 건가? 돌이 많아서인지 어제 봤던 돌 달팽이가 엄청 크게 만들어져서 있었다. 사진을 찍고 잠시 쉬다가 저 멀리 햇살이 비치는 곳이 오늘 도착지이길 바라며 다시 출발했다.
길을 걷다 보니 갈림길에서 양쪽 방향으로 모두 화살표가 있었다. 까미노도 길이 정비되면서 새로운 길이 생기기도 하고 우회로도 있다. 마을을 지나가야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니 일부러 마을 안으로 돌아가게 하기도 한다. 그러니 길이란 걷다 보면 만나게 된다란 생각을 가지고 내가 더 좋아하는 길을 선택하면 되는데 조금이나마 걷기 편하거나 짧은 길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오늘은 사람들이 많이 걷는 쪽을 택했다. 그 길에서 한국인 부부를 만났는데 이번이 세 번째 까미노라는 하와이에 사는 분들이었다. 잠시 길을 같이 걸으며 공장 지대가 아닌 공원을 통해서 부르고스로 들어가는 방법과 까미노 에피소드를 듣기도 했다.
바에서 잠시 쉬고 마을을 지나가는데 자기 집 앞에 부엔 까미노 페레그리노와 화살표를 그린 걸 보았다. 노란색이 바래지 않은 걸로 봐서 얼마 전에 그렸거나 계속 덧칠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까미노 위 마을들을 지나가면서 순례자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생각에 놀랄 때가 많다. 어찌 보면 매일매일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텐데... 그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준비해두는 사람들,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순례길을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환영받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이 길 위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집 앞 문을 나서면 순례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과연 이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순례길을 걸었을까? 여행은 일상이 아니기 때문에 좋은 거다. 이분들에겐 순례길이 일상이니까 오히려 환상이 없지 않을까? 그래서 오히려 환상을 쫓아 여행하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꿈을 투영해서 잘해주는 건 아닐까? 길을 걸으며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순례길 위에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을 한다 해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것 같다.
마을을 빠져나와 걷다 보니 부르고스로 들어가는 길을 잃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멈춰 서서 구글 지도를 보며 앞뒤로 오는 순례자들을 찾고 있는데 내 앞에서 가던 두 사람이 밭 중간을 가로질러 가는 게 보였다. 큰소리로 그들을 불러서 그쪽 길이 맞냐고 물어봤는데 그 밭 끝에 화살표가 있다면서 이 길이 공장지대가 아닌 공항을 끼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미안하긴 하지만 공장지대를 가로지르긴 싫으니까 밭 중간을 가로질러 넘어가기로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지나갔는지 밭 중간에 길이 나있었다. 나중에 K 군에게 들으니 그 길 끝까지 가면 삼거리에서 바닥에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다고 했다.
대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쉽지 않다. 공항 옆으로 돌아가는 길은 엄청 지루하고 빨리 지나가고만 싶었다. 그렇게 걸으며 말로 듣던 공원 초입에 들어갈 때 헝가리에서 온 토마스를 만났다. 얼마나 걸었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등 처음엔 뻔한 질문과 답을 이어갔다. 그러다 하는 일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는 출판사 편집자였다. 그래서 우리는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데미안', '그리스인 조르바' 등 좋아하는 책이 같았다. 좋아하는 관심사가 같다는 점이 우리를 신나게 만들어서 공원을 빠져나가는 내내 즐겁게 대화했다. 외국 사람과 책에 대한 얘기를 한 게 처음인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하고 다른 관점으로 보기도 해서 재미있었다. 다만 토마스 걸음이 빨라서 말하면서 걷는 게 조금 힘들었다. 결국 길 위에서 또 만나기로 인사하고 나는 잠시 쉬기로 했다.
열흘 정도 걸었다고 대도시가 어색하다.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에만 머물다가 도시에 오니 복잡하게만 느껴진다. 결국 까미노 화살표를 놓쳤다. 도시에도 화살표가 꽤 있지만 잠시 한눈팔면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까미노 길은 언제나 성당으로 통하기 때문에 화살표를 놓치면 일단 성당으로 가면 된다. 그래서 부르고스 대성당 첨탑만 바라보며 이리저리 골목을 헤매다 보니 어느덧 성당 앞 광장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알베르게 체크인을 한다. 하지만 어제 고민 끝에 호텔을 예약해서 체크인 시간까지 성당 광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부르고스는 공립 알베르게도 좋다는 평이 많았지만 한 번쯤 욕조에 몸을 담그고 편안하게 씻고 푹 쉬면서 혼자 있는 시간은 갖고 싶었다. 사실 길을 걸을 때도 숙소에서도 혼자이긴 하지만 온전히 혼자만 있는 시간은 드물다.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오픈된 공간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대중 속에 홀로 있는 느낌이다. 미치도록 혼자이지만 또 미치도록 혼자 있고 싶다.
숙박 앱에서 욕조가 있는 저렴한 호텔로 예약, 시설은 오래됐지만 깨끗한 느낌이었고 성당과 멀지 않은 위치라 좋았다. 오랜만에 욕조에 몸을 담그니 따뜻하고 나른한 느낌이 정말 좋았다. 짐도 다 꺼내서 환기하고 다시 정리하고 지금까지 지출한 돈과 남은 돈도 계산했다. 군것질도 하고 여유 있는 휴식을 취하고 대성당으로 갔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유료로 관람할 수 있고 세요도 찍어준다. 오디오 가이드가 있는데 한국어가 없어서 영어로 들으면서 1시간 40분 정도 둘러봤다. 정말 화려하고 웅장하고 대단했다. 고딕과 로코코 양식이 섞여 있는데 대성당을 짓는데 100년이 넘을 때도 있으니 다양한 양식들을 품고 있다. 다양한 가문 양식과 기도실을 보는 재미도 있었는데 그들의 헌금과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성당. 예전에 읽은 스페인 소설 '바다의 성당'이 떠오르며 아름답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있었다는 걸 알기에 마냥 감탄만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유네스코에 등재된 만큼 정말 볼거리도 많고 아름다웠다. 영어 가이드가 있다고는 하지만 들어도 잘 모르기도 하고 모르는 내용도 많아서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래도 박물관을 보는 기분으로 하나씩 보면 내용을 몰라도 예술 작품으로 보인다. 성당이란 공간이 주는 특유의 느낌이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세기를 뛰어넘는 시간 동안 보여준 믿음이 느껴져 대단하고 거룩하지만 무섭기도 했다.
성당을 보고 나와 근처 식당에서 리조또와 먹물 파스타를 먹었는데 분위기도 좋고 맛있었다. 같이 걷는 K 군이 다리가 아파서 내일은 쉴 수도 있을 거 같다고 했다. 늘 앞에서 뒤에서 함께 걸으며 의지를 많이 했는데 아쉽다. 쉴 때 쉬어야 악화되지 않고 또 걸을 수 있으니까... 아무리 옆에서 위로해줘도 본인이 제일 힘들다는 걸 알기에 하루 푹 쉬고 나면 좋아지길 바라본다.
호텔로 돌아와 음악을 들으며 또다시 욕조에 몸을 담갔다. 오늘은 길을 많이 걷진 않았지만 구경할게 많은 도시다 보니 오히려 도심에서 많이 걸었다. 순례길을 걷는 건 일상생활에서 걷는 것과 관광을 하며 걷는 것과는 다르다. 걷기를 위한 걷기랄까.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주는 즐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생각. 관성의 법칙처럼 발걸음을 옮기면 계속 발걸음을 옮겨서 걷고 또 걷고. 단순한 행위를 반복하게 됨으로써 멍해지는 일종의 명상으로 들어간다고 해야 할까. 가만히 앉아서 할 수도 있지만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도 산책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주는 즐거움. 혼자만이 가지는 여유. 오늘은 아주 좋은 하루였다. 내일부터는 끝없는 평원이라는 메세타 구간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는데 기대가 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끝까지 아프지 말기!! 행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