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여유를 느끼다

2018년 5월의 일상_12. 빌라프란카 몬테스 데 오카->아타푸에르카

by 에이치영

11일 차: 빌라프란카 몬테스 데 오카 -> 아타푸에르카_06:40 ~ 12:30(18km)

오늘은 20km 정도만 걷는 가벼운 일정이다.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이어서 한국에서도 날이 좋으면 지하철 한두 정거장은 걸어가서 타기도 하고 일을 하면 하루에 5-6km를 걷는데도 처음엔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이제 20km 정도는 가볍다고 생각할 만큼 몸도 마음도 적응이 됐나 보다. 봄이지만 여전히 아침저녁엔 꽤 춥다. 오늘 아침은 산 밑에서 출발해서 정말 추웠다. 추운 만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산을 올라 일출을 볼 수 있었다. 길을 걸으며 한 번은 꼭 보고 싶었는데... 언젠가 밤이나 새벽에 하늘 가득한 별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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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

산티아고 가는 길은 서쪽을 향해 따라가는 길이다. 그래서 등 뒤로 해가 떠오르는데 그럴 땐 모든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오늘도 무사히 걷게 해달라고 잠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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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추운 겨울을 느낀 산길>

산속에 순례자를 위한 오아시스가 있었는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 지 아직 운영하지 않았다. 햇빛에 잠시 앉아 쉬고 싶었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서 사진만 찍고 다시 걸었다. 알고 보니 이 구간은 오아시스를 빼곤 거의 12km 동안 아무것도 없는 길이었다. 까미노를 걸으면 중간중간 3-4시간씩 쉴 곳이 없는 구간이 있는데 그런 곳에는 오아시스처럼 간단한 음료를 파는 곳이나 기부 쉼터, 푸드 트럭 등이 있다. 그렇지만 순례자가 많이 지나갈 시간부터 열기 때문에 아침에 그 구간을 지난다면 먹을거리를 잘 챙기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바가 없으면 화장실도 없어 먹는 것도 조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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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숲을 지나 오르테가에 도착했다. 바로 눈에 보이는 바에 들어가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바에 들어가서 바람은 피할 수 있었지만 석조 건물이라 안에도 춥긴 했다.

IMG_1086.JPG <마을 이름이 새겨진 의자>

이곳에서부터 K 군을 만나 함께 걷기 시작했다. K 군은 어제부터 오른발이 아파서 천천히 걷고 있다. 나는 발목 붓기는 여전하고 아프긴 하지만 걸을 때는 큰 통증이 없는데 K 군은 걸으면 통증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약국이 문을 닫아서 가지고 있던 진통제를 나눠줬지만 약발은 잠시뿐인 것 같다. 나 역시 발 통증과 물집은 괜찮아졌지만 오늘부터 어깨랑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픈 쪽을 안 아프게 하려고 걷다 보니 균형이 맞지 않아 한 쪽이 괜찮아지면 다른 쪽에 문제가 생긴다. 잘 걷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아픈 곳이 있기 마련이다. 각자 안 아픈 곳이 없는데 그걸 다스리며 가는 길이 까미노다. 다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아픔에 다스리는 자기만의 방법과 노하우가 생기는 거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아파줄 수 없으니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육체적인 아픔이든 정신적인 아픔이든. 다행히도 난 지난 일주일간 아팠기 때문에 고통에 익숙해지고 아프지 않게 걷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걷는 순간을 즐기고 싶지만 고통이 생기면 어렵다. 모든 신경이 그곳으로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주변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고통만 생각하며 걷게 된다. 그러니 안 아프고 길을 걷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까미노다. 건강한 내 몸을 감사하게 만들어주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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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들판에 한가로이 있는 소 떼를 만났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주황색 바람막이를 입은 코지가 보였다. 어제 머물렀던 알베르게에서 만난 일본인 코지는 물감을 갖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간 그렸던 그림들을 보여줬는데 정말 멋진 그림이었다. 이 길을 걷는 아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인데 어제 알베르게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한 코지 역시 처음엔 한국 사람인 줄 알았다. 그 역시 만난 아시아 사람마다 한국 사람이었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코지는 우쿨렐레도 가지고 다니며 연주하는 이 길에서 꽤 유명한 순례자였다. 길을 걷다 보면 빨리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다리가 아파서 천천히 걸으면서도 길에서 여유 있게 마음에 드는 풍경을 즐기며 그림을 그리는 그의 여유가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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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거리가 짧아 심리적 여유가 있어서일까? 잠시 돌 달팽이를 따라 걸어보기도 하고 카우벨 소리와 바람 소리도 들으며 여유를 즐겼다. 사람들이 많이 머무르는 아헤스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마을이었다. 아헤스를 지나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선사시대 유적지가 있는 아타푸에르카가 나온다. 오늘 처음으로 알베르게가 문을 열기 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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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도착해서 빠르게 씻고 세탁과 건조를 맡겼다. 알베르게는 주방이 작긴 하지만 잘 관리되어 깨끗했다. 그리고 화장실에는 드라이기도 있었다. 얼마 만에 따뜻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려보는지... 하루 종일 찬바람으로 머리가 띵했는데 순식간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슈퍼마켓이 문을 닫아서 저녁은 근처 식당에 가서 먹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오후에 여유시간이 넘친다. 매번 오후에 도착해서 씻고 빨래하고 스트레칭하고 저녁 먹고 일기 쓰면 잠들 시간이었는데... 괜히 34일 일정으로 코스가 나뉜 게 아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20km가 딱 좋은 느낌. 이 마을은 고인돌이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으로 2000년도에 유네스코 세계 유적으로 등록됐다고 한다. 남은 오후 시간에 둘러보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고 했다. 박물관에 가는 걸 좋아하는데 정말 아쉬웠다. 대신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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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먹으러 간 레스토랑을 훌륭했다. 특히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보고는 쌈장으로 만든 소스가 있다며 추천해줬다. 정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긴 하나보다.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식사도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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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일찍 도착해서 오후 시간을 즐기려고 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하루였다. 하루치 길을 걷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다리도 아프고 힘들지만 마을을 구경하고 싶기도 하다. 내가 언제 또 와보겠냐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가면 평소보다 많이 돌아다니고 날씨도 좋았으면 좋겠고 박물관, 미술관도 휴관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이왕 걷는 거 비가 안 왔으면 좋겠고 대도시에 가면 관광도 하고 싶고 유명한 곳들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까미노 길에만 집중하면서 걷는 게 좋은지 대도시나 구경거리가 있으면 관광객 모드로 돌아가 둘러보는 것이 좋은지 아직 모르겠다. 둘 다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일정이나 내 체력이 허락지 않는다. 이 길에서 무얼 할 건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건지는(사람들과 교류할 수도 있고 마을을 둘러볼 수도 있고 글쓰기, 그림 그리기, 낮잠 자기, 쉬기 등) 온전히 내 선택이다. 특히 오늘 코지를 보면서 과연 나는 이 길을, 시간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지금도 공용 공간인 부엌에서는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다른 사람들과 수다 떨고 카드놀이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걷는 순간을 즐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마을에 도착해서 마을을 둘러보고 싶기도 하고 오늘처럼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빨리 도착해서 따뜻하게 쉬고만 싶기도 하고. 매일매일 순간순간이 다르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걷는 순간은 행복하다는 거다. 일단 그거면 됐다는 생각. 앞으로 남은 시간을 더 행복하게 보낼 선택을 하면 된다는 것.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행복할 선택. 지금처럼 크게 다치거나 아프지 말고 무사히 완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