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이 있어요.

2018년 5월의 일상_10. 나헤라->그라뇬

by 에이치영

9일 차: 나헤라->그라뇬_06:45 ~ 14:55(27.5km)

아침에 일어나 주방에서 길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알베르게 봉사자분이 노래를 틀어주셨다. 그 노래는 바로 'I have a dream'.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고 그날 아침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던 선곡이었다. 덕분에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오른발은 트레킹화가, 왼발은 운동화가 편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른발에 트레킹화를 신어봤는데 맞지 않았다. 결국 난 작은 사이즈 신발을 샀던 거였다. 내 발이 밤이 되면 붓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내 몸을 너무 몰랐던 거다. 나를 잘 안다는 건 내 성격이나 취향뿐만 아니라 내 몸도 잘 알아야 하는데 그동안 내가 내 몸에 대해 너무 무심했나 보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와 다른 나에 대해서... 결국 호스피탈로에게 말을 하고 신발은 나헤라 알베르게에 기부하고 왔다. 누군가 나와 같은 실수를 한 사람 중에 이 신발이 도움이 되길 바라본다. 신발을 두고 길을 나서니 오히려 홀가분하다. 트레킹화도 이곳에 오기 전에 새로 산 신발이라 아깝기는 했지만 내가 편히 가려면 두고 갈 수밖에 없다. 소유와 욕심 버리기. 역시 쇼핑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무엇이든 경험하고 그 누구의 의견보다 내 의견이 중요하다는 것. 내가 믿고 따라가면 그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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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 두고 온 트레킹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본다.>

조금은 섭섭하기도 했지만 홀가분하게 알베르게를 떠났다. 길을 출발할 때 봉사자분이 한 명 한 명 꼭 안아주고 부엔 까미노라고 말해주었다. 봉사자분들은 대부분 이 길을 걸었던 분이라던데 그들의 진심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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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산토도밍고를 지나 그라뇬까지 가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해가 쨍하게 나서 무척 더운 날이 예상됐다. 대신 가는 길 내내 예쁜 색감을 뽐내는 들판과 꽃, 하늘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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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가장 좋아하는 사진을 많이 찍은 날>

그늘이 없어 힘들었지만 멋진 풍경들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줬다. 걷고 걸어 산토도밍고 마을에 도착했다. 산토도밍고는 꽤 큰 마을이고 닭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는 마을이다. 그래서 이곳 성당에는 살아있는 닭이 있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했을 땐 축제 전야제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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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같이 구경하던 마을 주민이 내게 말하길, 여자들이 머리에 이고 가는 바구니 안에 빵이 들어있는데 그걸 요양원에 가서 나눠준다고 한다.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친절하게 설명해주려는 주민과 그 전통을 지금까지 지켜온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우리는 산토도밍고 성당을 찾아갔는데 성당은 박물관과 함께 운영하고 유료였다. 가방은 데스크에 맡기고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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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도밍고 성당은 박물관도 있고 옥상에 나가볼 수도 있어서 둘러보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성당 안에 사는 닭을 보려고 한참을 찾았는데 지도를 아무리 봐도 제 위치에 없는 듯했는데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득 성당 안에 살고 있는 닭들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원은 아니지만 동물원 안에 살고 있는 기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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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나온 우리는 다음 마을인 그라뇬까지 가기로 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을은 작지만 성당에서 운영하는 기부제 알베르게로 유명한 마을이다. 길을 걷기 전 다른 사람들이 쓴 블로그를 몇 개 챙겨봤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던 한 블로그에서 이곳 알베르게가 참 좋다고 했기에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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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라뇬에 도착. 성당 알베르게는 침대가 아니라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알베르게 봉사자분이 알베르게 사용과 규칙을 설명해주시는데 기부 제로 운영하고 다 같이 저녁 식사를 준비, 먹고 치우며 식사가 끝나고 조용한 세리머니를 진행한다. 세탁기가 없고 손빨래를 한 뒤 성당 뒷마당으로 나가서 빨랫줄에 널어 말려야 하는데 이곳을 찾느라 한참이 걸렸다. 아침 식사도 제공되는데 나무 계단이 삐거덕 소리가 많이 나니 6시 30분까지는 깼어도 자리를 지켜달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지냈던 다른 알베르게와는 다르게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있다는 게 특이했고 이곳만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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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함께 먹기에 나는 샐러드에 들어갈 야채와 빵을 썰었다. 식탁을 이어 붙이고 의자를 꺼내와 세팅하고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식사 전 'we will rock you' 노래에 맞춰 다 같이 기도했다. 식사를 마치고 잠들기 전 성당에서 조용한 세리머니를 가졌다. 참여는 자율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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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위쪽 성가대 자리에서 진행하는 데 불을 끄고 초만 밝힌 공간에서 까미노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자리였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억양과 제스처 아니 그저 눈빛만 봐도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국말로 이야기했는데 이들 역시 내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내 얘기를 소중히 들어준다는 경험은 훌륭했다. 세리머니가 끝나고 한 바퀴 돌면서 모두 포옹하는데 봉사자분이 이곳에 세요는 없지만 지금 우리가 나눈 이 경험이 이곳만의 특별한 세요라고 말했다.

잠들기 전 공용 공간에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일기로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역시 일기를 쓰러 갔는데 이곳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나오미를 만났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나오미 이름을 한국어로 적어주었다. 이 인연을 시작으로 우리는 산티아고 대성당에서까지 계속 만나게 된다.


오늘 알베르게에서 경험한 것은 특별했다. 내가 이 길을 걷고 있고 같이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이해받고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오늘 시작은 욕심과 무지, 내려놓음에 대한 생각이었는데 내가 나를 잘 몰라서 내 몸을 힘들게 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내 욕심 때문에 트레킹화를 짊어지고 나헤라까지 갔으니 내 몸과 발에게 미안했다. 나헤라 알베르게에서 틀어준 'I have a dream'이 오늘 주제곡이다.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이 길을 왜 걷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줬다. 그래도 나는 일을 하며 행복하고 몸은 힘들지만 걷는 내내 행복한 나를 느낀다. 그래도 내가 무얼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가고 싶다. 이 길이 끝날 때쯤엔 알 수 있을까? 오늘 하루는 생각도 많고 나에 대해 좀 더 알아가는 좋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남은 20여 일의 시간이 더 좋은 경험이 될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으로도 오늘만 같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