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외로움

2018년 5월의 일상_09. 로그로뇨->나헤라

by 에이치영

8일 차: 로그로뇨 -> 나헤라_06:50 ~ 15:30(31km)

제일 먼저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로그로뇨는 큰 도시라 신호등과 갈림길을 많이 만났고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아 도심을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도심을 빠져나오면 큰 공원을 지나게 되는데 공원 곳곳에 가리비 모양 순례길 표시가 눈에 띄었다. 확실히 도심을 빠져나와 공원길을 걸으니 한결 수월함이 느껴졌다. 도심을 빠져나오는데 긴장을 해서 그런가? 아니면 일주일 동안 걸은 피로가 쌓여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면 혹시나 하는 욕심에 트레킹화를 버리지 못하고 배낭에 대롱대롱 매달아서 배낭이 더 무거워서 그런 걸까? 매일매일 힘들어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곤 했는데 오늘 아침은 걷는데 유난히 힘이 든다. 게다가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더니 결국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30km를 걷는 긴 하루가 될 텐데 걱정이 앞선다. 공원을 빠져나가기 전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간식을 먹고 힘을 내서 출발해본다. 첫날처럼 세찬 비는 아니어서 걷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다만 고속도로 옆을 지나가는 재미없는 길이 이어졌는데 그 옆 철조망에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만들어 매달아 놓은 나무 십자가들이 그나마 시선을 끌어 다채롭게 해 줬다. 사진을 안 찍은 걸 보니 시끄러운 차 소리에 빨리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나 보다.

커다란 황소 표지판을 만난 이후부턴 비도 그치고 한적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어서 한결 수월했다. 그러다가 만난 나바레떼 마을 초입에 있는 바에서 오렌지 주스와 빵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빨간 티셔츠를 입고 걷는 이탈리아 아부지, 오라치오를 만났다. 슈퍼마리오를 연상시킬 만큼 멋진 콧수염과 환한 미소를 가진 할아버지인데 며칠 전부터 길에서 계속 마주쳤다. 부부가 함께 걷는데 두 분 다 어찌나 잘 걸으시는지 쉬엄쉬엄 걷는 것 같아 보여도 매번 우리보다 빨리 도착하셨다. 정말 반가운 마음이 들어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될지 여쭤보았다. 오라치오 아부지가 흔쾌히 승낙해줘서 우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었다. 마을은 작고 조용했다. 지나가는 길에 성당이 있어 잠시 들려서 구경하고 가족과 J 언니, K 군, 이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을 위해 초를 봉헌하고 기도했다.

성당에서 나와보니 점점 해가 나고 더워지기 시작했다. 갈 길이 멀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마을인 벤토사까지는 오르막이었는데 아침부터 유난히 컨디션이 좋지 않고 날씨까지 더워지니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분명 나바레떼 바에서도 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나만 제자리를 뱅뱅 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길에서도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온전히 혼자 걸었다. 벤토사를 지날 때쯤 발이 불편해 신발을 벗어보니 발가락 사이에 작은 물집이 생겼다. 응급처치로 밴드를 붙이고 걸었는데 이미 물집이란 걸 알고 나니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신경 쓰였다.

<사람 하나 없는 포도밭 옆 길>

걸음이 빠른 K 군이 앞서가면서 내게 어디쯤인지 물었다. 나도 내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는데 진짜 앞뒤로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아 무서웠다. 어제 J 언니가 오늘도 힘들면 로그로뇨에 하루 더 머무르라고 했었는데... 갑자기 J 언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길에 선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고 나 역시 조금씩이라도 하루하루 꾸준히 걷고 싶었기에 오늘 아침 길을 나선 참이었다. 중간에 벤토사로 빠져서 쉴까도 싶었지만 K 군과도 떨어지면 정말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아 다시 한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 힘들게 걷고 걸어 나헤라에 도착했다. 그런데 알베르게가 있는 곳에 가려면 마을 초입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어제 호스텔에 묵었기에 오늘은 알베르게 예약을 하지 않고 왔는데 우리가 가려던 알베르게는 만실이라 다른 곳도 가봤는데 그곳도 만실이었다. 길에 없던 사람들이 모두 나헤라에 도착했나 보다. 결국 공립 알베르게로 갔다. 그곳도 체크인을 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과연 우리 자리가 있을까 조마조마했다. 시설이 별로라는 후기를 봐서 걱정했었는데 공립 알베르게, 무시니팔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체크인 데스크 앞은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음료수가 있었고 봉사자들은 친절했다. 하지만 침실은 모르는 사람과 한 침대에서 자는 기분이 들 만큼 2층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였다. 다행히도 2층 침대에 K 군과 바로 옆 침대로 배정받았다. 공립 알베르게는 선착순이고 침대를 배정해주는 경우도 있는데 주로 젊은 사람들은 2층을 배정받는다. 샤워를 하고 세탁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손세탁을 해서 옷을 널고 저녁을 해 먹으려고 슈퍼마켓을 찾아 나섰다.

알베르게를 찾으러 강을 건널 때는 너무 힘들었는데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 돌아오며 보는 강은 기분 좋은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역시 쉴 곳을 찾고 먹을 거 챙겨 들고 돌아가는 길은 몸도 마음도 가벼운 법.

물집 치료를 위해 알베르게 앞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새 신발 사이즈가 커서 왼쪽 발뒤꿈치는 안 아프지만 오른발은 복사뼈 부분이 꽉 낀다. 오른발은 트레킹화가, 왼발은 운동화가 편하니까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다녀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해본다. 소독한 바늘로 물집을 터뜨리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치료를 마치고 알베르게 앞 강가로 나가봤다.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거나 요가를 하고 혼자 생각에 잠기는 등 자기만의 방식으로 여유를 즐기는 순례자들.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도 한가로이 벤치에 앉아계신다. 이 시간이 참 평화롭다.

<평화로운 강가 풍경>
<알베르게에 있던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오늘 하루는 동행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함께 걷는 길 위에서 순례자들도 많이 만나지 못하고 온전히 혼자 걸었던 하루. 그동안 J 언니와 K 군과 함께 다니면서 의지를 많이 했나 보다. 내 앞에서 이끌어주고 같이 걷던 사람들이 없어 더 힘들었던 하루. 그래서 오늘따라 걸으며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온 길이기에 혼자 걷는 게 당연하지만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지난 일주일. 순례길을 걷는다는 자체만으로도 좋았지만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 길에 온기를 더해줬다. 서로 도와주며 묵묵히 같이 걷고 말하지 않아도 힘이 된 고마운 사람들.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지난 그 시간이 그립다니, 신기한 일이다. 전체 일정 중 1/4이 지났는데 앞으로 남은 많은 시간들도 지금처럼만 행복하길 바라본다.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