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의 일상_08. 로스아르코스->로그로뇨
7일 차: 로스 아르코스 -> 로그로뇨_07:15 ~ 15:45(22km)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침낭 정리와 배낭을 꾸리는 것도 서서히 익숙해진다. 오늘도 우리만 사용하는 방이라 환하게 불을 켜고 짐을 챙긴다. 주방에서 어제 산 초코빵과 우유를 먹었다. 내 앞에는 엄마와 딸이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엄마가 딸 배낭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언젠가 나도 부모님과 함께 오면 저런 모습이겠지?
길을 떠나기 전 알베르게 앞마당에서 J 언니와 K 군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생장에서부터 함께 걸었는데 오늘부터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번 그림자 사진 이후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우리 셋의 단체 사진. _J 언니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은 우리가 헤어지던 날로부터 두 달이 지난 후에 받았다. 잔뜩 긴장하고 어색한 모습의 사진 한 장으로 새삼 길을 걷던 모든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알베르게에서 나와 성당 앞 광장을 가로질러 로스 아르코스를 빠져나왔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 비가 오지 않으면 이런 날씨가 걷기에는 참 좋다. 오늘은 지금까지 가장 긴 거리를 걷는 날이다. 생장 사무실에서 크리덴샬을 받을 때 고도가 적힌 일정표를 나눠주는데 권장하는 일정은 34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상 30-31일 안에 걸어야 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하루에 걷는 코스가 길어질 예정이다.
걸음이 빠른 K 군이 앞서갔고 J 언니와 나는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발목이 덜 아프게 신발을 신는 방법을 찾아내서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걸음이 느린 나를 언니가 앞에서 옆에서 천천히 이끌어주며 함께 걸었다.
부모님께서 꽃을 좋아하셔서 길을 걸을 때마다 예쁜 꽃을 보면 사진을 찍어 보내드린다. 이름도 모르는 꽃이지만 한국에서 보던 꽃도 있고 이곳에서 처음 보는 꽃들도 많았다. 여름에 오면 낮에 너무 덥고 가을엔 주렁주렁 달린 포도와 끝없이 펼쳐진 황금 들판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꽃을 좋아하시는 부모님과 함께 올 때는 꼭 봄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아나에 도착했다. 언니는 오늘 이곳에 머무르고 나는 점심을 먹고 난 뒤에 로그로뇨로 출발할 예정이다. 성당 앞 바에 짐을 풀고 간단히 먹을 식사를 주문했다. 오늘 아침에 마신 우유 때문인지 배가 계속 아팠다. 바에서 계속 화장실에 들락날락. 이 곳에서 반가운 얼굴들, 다니엘과 빅토리아 아주머니, 로리와 세라를 만났다. 로리는 내 발이 괜찮냐고 물어보며 로그로뇨는 큰 도시니까 불편하면 꼭 의사를 만나보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J 언니와 인사를 했다. 혼자 떠나온 길에서 처음으로 만나 서로 의지하며 걸었던 일주일. 만나면 헤어지는 게 당연한데 막상 언니와 헤어지려니 많이 아쉬웠다. 언니를 꽉 안아주며 따뜻한 포옹으로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표현이 서툰 나는 애써 담담한 척 언니에게 인사를 하고 출발했다. 이미 점심까지 먹은 뒤라 시간이 늦어 비안나를 둘러보진 못하고 가지만 다음에 오면 이곳에서 하루 머물고 싶을 만큼 고풍스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었다.
오후가 되니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면서 더워지기 시작했다. 비아나에서 로그로뇨까지는 약 10km 떨어진 곳이라 갈 길은 멀고 다리도 아팠다. 도시로 들어가는 걷기 편한 길이 계속 이어져서 샌들로 갈아 신었다. 확실히 샌들을 신으면 발도 가벼워지고 발뒤꿈치도 덜 아파서 한결 편하다.
육교를 넘어 말끔한 소나무길을 걷고 있을 때 브라질에서 온 마르시아를 만났다. 그녀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고 있기에 괜찮은지 물어본 것을 계기로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걸었다. 내가 아팠을 때 격려해주고 도움을 준 순례자들 덕분에 아픔을 잊고 기분이 좋아졌던 기억이 나서 길을 걷다 누군가 아파 보이면 나도 꼭 괜찮은지, 도움이 필요한지 묻고 한다. 그녀도 나도 영어가 서툴렀기에 손짓으로, 마음으로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포도주로 유명하다는 라 리오하 지역으로 들어섰다. 이전까지는 나바라 지역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도 경계선을 넘은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경기도를 지나 충청도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이쯤에서 스위스에서 온 패트릭을 만나 함께 걸었다. 그는 배낭에 텐트와 캠핑 용품을 들고 다녔는데 내년에 미국 PCT 종주를 앞두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나는 책과 영화로 접해 PCT를 알고 있기에 그와 세계적인 트레킹길, 한국 올레길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해가 뜨거울 때 왜 유럽 사람들은 짧은 옷을 입고 아시아 사람들은 긴 옷을 입고 얼굴까지 가리는지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트레킹을 좋아하는 자유분방한 영혼이던 그는 자신이 가진 생각을 논리적으로 얘기했는데 당당한 그 모습이 좋아 보였다. 그와 함께였기에 도시로 들어가는 지루한 길을 유쾌하게 걸을 수 있었다. 매일 지나가는 순례자 수를 기록한다는 할머니 집 앞을 지나 로그로뇨 입구에 도착했다. 먼저 간 K 군이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족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는데 발견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잠시 쉬었다. 패트릭은 심한 감기에 걸려서 이곳에서 2박을 할 예정이라며 편히 쉴 수 있는 호텔이나 호스텔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_기본적으로 공립 알베르게는 연박이 안된다. 나는 먼저 도착해 숙소를 잡은 K 군에게 연락해서 숙소 위치를 확인하고 감기가 빨리 나아지길 바란다는 인사를 하고 패트릭과 헤어졌다.
전날 숙박 예약을 하지 않아서 오늘은 먼저 도착한 K 군과 아저씨가 숙소를 잡았다.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기도 했고 로르로뇨는 꽤 큰 도시이기에 편한 곳에서 숙박을 하고자 알베르게가 아닌 호스텔에 묵기로 했다. 가격은 좀 비쌌지만(알베르게와 거의 2배 정도 차이가 났던 걸로 기억한다.) 6명이 쓰는 방에 4명만 묵었고 각각 베드에 커튼이 있어서 편했다. 다리가 아픈 나를 위해 먼저 도착했음에도 1층 침대를 양보해준 K 군에게 정말 고마웠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빨래가 안된다는 점이었다. K 군과 아저씨, 어제 길에서 마주친 한국인 청년과 함께 방을 썼다.
도시에 왔으니 병원에 가보려고 리셉션에 병원 위치를 물어봤다. 병원은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하고 예약을 하지 않고 가면 대기 시간이 길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약사 아주머니가 말해준 것도 생각나서 고민 끝에 병원에 가지 않고 신발을 바꿔보기로 결정, 근처 신발 가게 위치를 묻고 길을 나섰다. 여러 골목을 지나 찾은 신발 가게에서 나름 거금을 내고 아디다스 운동화를 샀다. 원래 신던 사이즈보다 훨씬 큰 신발을 샀더니 발뒤꿈치가 안 닿아 아프지 않았다. 내일 걸어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우선은 만족스럽다.
로그로뇨는 타파스로 유명하다고 해서 저녁에 먹으러 가기로 하고 그 전까진 도시 탐방. 제일 먼저 성당에 들렀다. 성당 안을 구경하고 의자에 앉아 J 언니가 보낸 장문의 카톡에 답을 보냈다. 헤어질 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다.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고 타파스를 먹으러 가던 길에서 로리와 세라를 만났다. 병원에 다녀왔다고 묻는 로리에게 새 신발을 샀다고 했다. 그녀는 잘했다고 앞으로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얘기했다. 그녀 옆에 있던 친구도 오늘 새 신발을 샀다며 보여줬다. 스쳐 지나갈 수 있던 내게 관심을 가지고 만날 때마다 반갑게 맞아줘서 고마웠다. 세라는 오늘을 끝으로 영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짧은 휴가를 받아 순례길을 나눠서 걷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러 사람들과 헤어지는 날이구나란 생각이 들어서 슬펐다.
타파스 골목에서 이곳 양송이 타파스가 제일 유명하다고 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잠시 기다렸다가 오픈하자마자 입장. 갓 만들어진 양송이 타파스를 와인과 함께 먹었다. 와인을 잘 모르는 나는 직원 언니에게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종류가 너무 많고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니 직접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다. 나는 조금 달콤한 화이트 와인으로 결정했는데 와인잔을 건네주며 직원 언니도 자신도 그렇게 마신다며 잘한 선택이라고 웃으며 말해줬다. 타파스는 조금 짰지만 와인과 함께 먹으니 맛있었다. 곧 많은 사람이 들어왔고 어느새 매장 안에는 사람들도 꽉 찼다. 특이한 점은 바에만 앉을 의자가 몇 개 있었고 벽에 테이블이 붙어있는 구조라 대부분 서서 먹었다. 알고 보니 타파스는 한 곳에서 오래 자리를 잡고 먹는 게 아니라 가볍게 서서 이 가게에서 맛보고 저 가게로 이동해서 먹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가게마다 타파스 종류가 다양했다. 우리도 자리를 옮겨 다른 타파스를 맛보기로 했다.
옆 가게로 옮겨 연어와 달팽이 타파스를 먹었다. 처음에 정말 맛있는 걸 먹어서 그런지 다른 타파스는 평범했다. 이때부터 며칠을 함께 지낸 아저씨가 불편해졌다. 오늘 타파스를 먹으면서 아저씨가 나는 뭐가 맛있는지 잘 모르겠으니 나에게 주문과 계산을 하고 나중에 정산하자고 하셨다. 이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술을 마셔서 그런 지 하나둘씩 내가 불편해하는 대화 주제들이 나왔다. 물론 아저씨가 나보다 더 나이가 있으시니 좋은 얘기를 해주고 싶으셨던 거겠지만 듣고 있던 나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숙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과일 가게에 들러 내일 먹을 간식을 샀다.
오늘은 만남과 헤어짐을 생각하는 하루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 맺음에 지칠 때가 있다. 그런데 이 길은 혼자 와서 친구가 되기도 하고 또다시 혼자가 되기도 한다. 매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구속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아서 잘 지낼 수 있는 건 아닐까?
오랜만에 만난 도시여서 그런 지 차도 소음도 수많은 사람도 적응이 안된다. 까미노에서만큼은 순례자를 위한 작고 조용한 마을에 머무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내일은 새 신발을 신고 걷는다. 제발 별일 없기를. 건강하게 무사히.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