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기도를 만드는 길을 걷다.

2018년 5월의 일상_07.에스테야->로스아르코스

by 에이치영

6일 차: 에스테야 -> 로스 아르코스_07:20 ~ 14:10 (22km)

우리만 사용하는 방이라서 환하게 불을 켜고 짐을 챙겼다. 전날 아무리 힘들었어도 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걸을 힘이 생긴다. 역시 사람은 잠을 잘 자는 게 중요하다. 오늘은 오르막 내리막이 별로 없는 평지고 다른 날에 비해 적게 걷는다. 그리고 순례길에서 또 다른 유명한 장소,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는 날이기도 하다. 며칠 전부터 넓은 포도밭이 보이더라니... 이라체 수도원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순례자들을 위해 무료로 와인과 물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에스테야를 빠져나가자마자 바로 이라체 수도원이 보인다. 수도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장간에서 조개 모양 목걸이, 지팡이 등 다양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모두 직접 만드신 거라 같은 물건이지만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갖고 싶었지만 앞으로도 걸을 날이 20일은 남은 순례자가 배낭을 더 무겁게 만드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는 생각에 애써 발걸음을 돌렸다.

와인 맛을 모르는 나는 물병에 물을 채운 뒤, J 언니가 담은 와인을 맛봤다. 음.. 역시 술맛은 모르겠다. 잠시 와인을 마시고 쉬면서 언니가 대장간에서 산 물건을 보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K 군이 엄마에게 줄 선물을 사겠다며 다시 돌아갔다 오겠다고 말했고 나 역시 기회는 이때다 싶어 배낭을 언니에게 맡기고 따라갔다. 마음에 두었던 철로 만든 지팡이 모양의 기념품을 샀다. 대장간에서는 아예기라고 적힌 오렌지색 세요를 찍어줬다. 지금까지 검은색과 파란색 세요만 받았는데 왠지 상큼한 기분이 들었다.

<왼쪽에선 와인이 오른쪽에선 물이 나온다.>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짧지만 산길을 걸어야 하고 오른쪽으로 가면 길지만 평지라고 했다. K 군은 왼쪽, 언니와 나는 오른쪽으로 가기로 했다.

두 번째로 만난 작은 마을,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 그늘을 찾아 잠시 쉬던 중에 다른 순례자들이 배낭을 밖에 놓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그곳은 작은 성당 입구였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가족을 위해 초를 봉헌하고 기도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그곳에 계시면서 친절하게 세요도 찍어주셨다. 나이가 들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게 참 좋아 보였다. 우리나라 성당에도 이런 분들이 계시겠지.

<처음으로 초를 봉헌하고 기도했던 작은 마을의 아담한 성당>

짧은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세요 부부를 만났다. 어느 나라에서 온 분들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 세요가 있는 곳을 알려줘서 언니와 나는 그들을 세요 부부라고 불렀다. 바로 이 앞에 있는 바에 가면 아주 예쁜 하트 모양 세요를 찍어준다며 꼭 찍고 가라고 알려줬다. 하트 모양 세요는 심지어 빨간색이었다. 오늘은 내 크리덴샬이 다채로워지는 날이다. 오늘 풍경도 유난히 다채로웠다. 푸른 밀밭과 노란 유채꽃, 분홍꽃, 파란 하늘, 흰 구름. 정말 아름다웠다. 그늘이 없어 조금 힘든 길이긴 했지만 나는 비가 오는 날보다는 이렇게 더운 날이 더 좋다.

<윈도우 배경화면 같던, 다채로움을 뽐내던 길>

오늘은 J 언니와 함께 걷는 마지막 날이다. 시간 여유가 있는 언니는 좀 더 천천히 걷기로 해서 내일 비아나에서 멈추고 30일 일정으로 온 나와 K 군은 로그로뇨까지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인연이고 마치 큰언니처럼 이것저것 챙겨주던 언니와 헤어지려고 하니 오늘 함께 걷는 이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남은 3주 동안 또다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겠지만 무엇이든 첫 번째 인연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언니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걷다 보니 푸드 트럭이 보이고 아까 이라체 수도원에서 갈라졌던 길이 합쳐졌다.

<벌써부터 헤어짐이 아쉬워 몰래 찍은 언니 뒷모습>

그늘이 없는 길을 걸을 때는 쉴 곳이 마땅찮았다. 그럴 때 우린 그냥 길가 옆 작은 그늘 바닥에 앉아 쉬웠다. 누군가가 앉아서 쉬면 으레 그곳이 쉼터인 양 다른 사람들도 와서 함께 쉬었다. 쉬면서 서로 가져온 간식들을 나눠 먹기도 하고 길을 걸을 때 유용한 정보들을 나누기도 한다. 이번 휴식에선 올리브 절임과 스타킹이 주요 화제였다. 외국 할머니께서 작은 올리브 통조림을 까서 모두에게 나눠주셨는데 날이 더우니 살짝 짠 올리브 절임이 아주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고 말해주셨다. 평소에 올리브 절임은 샌드위치에 넣어먹는 걸로만 생각했던 나는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다. 언니가 사진을 찍었고 이후 언니도 나도 마트에서 올리브 통조림을 사서 먹곤 했다. 물집방지를 위해 쉴 때면 항상 양말을 벗고 발을 말린 후 바셀린을 바르고 양말을 다시 신고는 했다. 이런 모습을 보던 외국인 아저씨가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며 자신의 발을 보여줬는데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을 신고 계셨다. 스타킹을 신으면 마찰이 줄어서 물집 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의외의 방법이었는데 나라마다 물집을 방지하는 방법도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언니가 스타킹을 신고 얘기해줬는데 바셀린을 바른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오늘 묵는 알베르게도 2층 침대 2개가 한 방이라 우리끼리만 쓸 수 있었다. 알베르게는 꽤 괜찮은 시설이었다. 특히 짤순이라고 부를만한 기계가 뒷마당에 있었는데 밀가루를 뽑는 것처럼 생긴 기계로 손빨래 이후 이곳에 빨래를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물기가 제거되어 나오는 아주 독특한 물건이었다. 성능도 무척 좋아 물기가 쫘악 빠졌다. 도착하면 늘 하는 것처럼 샤워와 빨래, 스트레칭을 하고 난 후 식사를 하러 나갔다.

<오늘의 알베르게>

성당 앞 광장에서 밥을 먹는데 옆 테이블에 큰 강아지가 정말 얌전하고 귀여웠다. 그리고 뒤쪽 테이블에선 한국에서 오신 70대 부부께서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급하게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랜 시간 준비해서 떠나온 길이라 많이 아쉽다고 하셨는데 부디 한국으로 돌아가 장례를 잘 마치고 이후 다시 한번 이곳으로 오시길 바라본다.

광장 뒤편에서는 산타 마리아 성당이 있었다. 마리아를 위해 만든 성당인 듯 본당 한가운데 마리아 성상이 있다. 성당을 구경하고 나오면서 오늘 저녁 미사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은 꼭 미사를 드려야지. 성당 구경을 하고 마을을 좀 둘러보다가 빵집에 들러 내일 아침거리를 샀다. 주인아주머니 추천 메뉴였던 초코빵. 아침에 흰 우유와 함께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쓴 돈을 계산해봤다. 신용카드가 잘 안된다는 말을 듣고 현금을 꽤 들고 왔는데 생각보다 많이 쓴 것 같다. 초반 며칠동안은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 기록해두곤 했는데 나 혼자 쓰는 거니까 나를 위해서 썼겠거니 하고 어느 순간부터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는 오픈된 공간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쉽게 돈을 확인하거나 정리할 수 없기도 하고. 하지만 앞으로 남은 일정이 많으니 조금 아껴 써야겠다.


저녁 미사 시간에 맞춰 성당에 도착했다. 성당 안에서는 소리가 잘 울리는데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미사 전에 함께 기도하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너무 오랜만에 드리는 미사라 몰래 온 사람처럼 뒷자리 구석에 앉았다. 미사 중 평화 인사를 할 때 반가운 얼굴이 보였는데 어제 길에서 만난 파리 아저씨였다. 아저씨와 인사를 하며 악수를 하는데 손을 꽉 잡아주셨다. 아저씨 손에서 따뜻한 온기와 강한 힘이 전해져서 좋았다. 성당에 왔으니 평소에 하지 않는 기도를 하기도 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스페인어로 미사가 진행됐기에 그냥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기도를 했다.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생각, 그 선택에 대한 결과를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그 어떤 선한 힘으로 나를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고 기도했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도. 그리고 처음으로 수진 언니에 대한 생각도 말했다. 그녀가 우리 가족의 수호천사로 함께함을 믿는다는 내 생각. 이 길을 걷는 동안에도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 평소에 난 간절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그저 간절했다. 간절히 기도했다. 한국에서 미사를 봐도 이런 기분이 들까? 미사를 마치고 순례자들은 앞으로 나가 신부님께서 해주시는 성당 얘기를 듣고 각 나라 언어로 된 순례자 기도문을 받았다.

일기를 쓰러 알베르게 공용 공간으로 내려왔는데 J 언니도 그곳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독일에서 온 빌리나와 세베린과 이야기를 나눴다. 휴가를 받아 일주일 동안 걷고 있고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우리는 한국 분단 이슈와 이 길에 왜 한국 사람이 많은지, 축구 얘기, 각자 언어로 숫자 알려주기 등 생각보다 많은 얘기를 했다. 서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했지만 유쾌하고 웃음이 나는 시간이었다.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소중하고 기억에 남는 인연이 된다. 서로를 걱정하고 존중해주고 궁금해하고 안부를 묻는다. 다시 만나면 더욱 반갑게 인사한다. 이래서 다들 이 길을 걷는구나. 짧은 시간이지만 이 길과 사랑에 빠진 듯하다.


힘들 때도 있지만 그 끝에는 늘 기분 좋은 일이 있다. 언덕을 올라서면 멋진 풍경이 있듯이. 바쁘게 지나가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듯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 주변 사람들도 보고. 이 길이 육체적으론 힘들긴 하지만 마음은 행복하다. 이런 내 마음이 부모님께도 전해진 걸까? 오늘 아빠가 순례길에 오고 싶다고 얘기하셨다. 내년이나 2년 후쯤 부모님과 함께 올 수 있을까? 앞으로 좀 더 꼼꼼히 기억하고 알아가야겠다. 언젠가 부모님과 같이 걸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앞으로도 파이팅!! _결국 코로나로 2020년 5월에 떠나기로 준비한 부모님과의 순례길은 무기한 연장되고 있다. 부디 2022년에는 떠날 수 있기를 오늘도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