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의 일상_05.팜플로냐->푸엔테 라 레이나
4일 차: 팜플로냐 -> 푸엔테 라 레이나_07:30 ~ 15:40 (24km)
오늘도 역시 침낭에 짐을 가득 넣고 공용공간으로 나와 배낭을 꾸린다. 조금은 익숙해진 아침 일과다.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방이 좀 소란스럽다. 알고 보니 아침에 K 군 알람이 울렸는데 그 소리에 같은 방을 쓰던 외국인 순례자가 잠에서 깼나보다. 자신은 순례길에서 전화기도 쓰지 않고 알람도 맞추지 않는다며 시끄럽다고 뭐라고 하는 눈치다. K 군이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데도 외국인은 톡 쏘아붙인다. 무언가 자신을 방해했다고 느끼는 걸까? 본인이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쓰지 말란 법은 없는데.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나흘째. 평소보다 체력 소모가 많고 힘든 여정이다 보니 다들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조금씩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으면 좋을텐데. 내가 가진 생각이 정답은 아니니까.
발뒤꿈치가 아파서 출발하기 전과 샤워하고 난 뒤에는 스트레칭을 꼬박꼬박 챙겨서 한다. 그래서 우리 셋 중에 준비가 가장 늦다. 그래도 내 옆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는 두 사람이 있어서 든든한 아침이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축제와도 같던 주말이 지난 새벽. 돌들로 이루어진 골목마다 청소차가 물청소를 하고 아직 덜 치워진 공간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
오늘은 순례길 초반에 만나는 유명한 장소, 용서의 언덕을 넘는 날이다. 발이 아파 신발을 제대로 신을 수가 없다. 결국 길을 걷다 멈춰서 샌들로 바꿔 신고 나서야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이래서 용서의 언덕을 잘 넘을 수나 있을까? 걱정을 가득 안고 도심을 빠져나갔다.
도심을 벗어난 시골길에서 뜨거운 태양을 만났다. 해를 가려줄 구름도 없고 나무도 없어 땡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걸었다. 하필 늘 숙소에서 입는 옷을 입고 걸은 후 세탁하겠다고 히트텍까지 입었는데. 완전 낭패다.
_추위는 많이 타는 나는 알베르게에서 레깅스 말고 히트텍 하의를 입고 반바지를 입고 지낸다. 5월인데도 알베르게나 성당은 석조 건물이라 그런 지 내부가 추웠다. 경량 패딩도 필수.
발은 아프고 다리는 덥고 히트텍을 벗자니 반바지라 새까맣게 탈 것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걷다가 용서의 언덕을 오르기 직전 작은 마을에 있는 바에 들렀다. 사람이 많아 우린 가벼운 음식을 시켜 들고 나와 근처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파리 민박집에서 만나 몽파르나스 역까지 함께 걸어갔던 아저씨였다. 나보다 하루 늦게 출발하신다고 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걸음이 엄청 빠른 분인가보다. 며칠만에 아는 한국 사람을 만나서 반가운 건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어디까지 갈 예정이냐고 묻고 알베르게를 소개해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어제 예약한 알베르게 이름과 주소를 알려드렸다.
_우리는 어제 알베르게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오늘 어디에서 묵을지 얘기하고 있었는데 친절한 알베르게 주인이 괜찮은 곳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예약까지 해준단다. 그때까진 숙소 예약이 되는 줄 몰랐다. 알고보니 공립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설 알베르게는 예약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늘 묵는 알베르게 주인에게 추천을 해달라며 예약을 부탁할 수도 있고 길을 걷다가 일정이 늦어지게 된다면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할 수도 있다.
양말까지 벗고 휴식을 취한 우리는 용서의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언덕이라고 만만하게 볼 경사는 아니었다. 드디어 용서의 언덕에 올랐다. 까미노 관련 책 표지에 실리기도 하고, 까미노 사진을 보면 꼭 빠지지 않는 인증샷 장소. 그래서 당연히 나도 인증샷 한 장. 원래 사진을 잘 찍는 편이 아닌데 생존 신고 겸 추억이라 동상과 같은 포즈로 한 장 찍었다.
멀리서부터 보였던 풍력발전기가 괜히 설치된 게 아니란 걸 증명하듯 정상에는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벤치에 엉덩이만 걸치고 잠시 쉬고 땀이 식기 전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내리막길은 첫날 만났던 피레네 산맥을 내려올 때처럼 무척 가파르고 크고 작은 돌멩이가 많아 쉽게 발목을 접질리거나 다치기 쉬웠다. 무거운 배낭까지 등에 짊어지고 있으니 더욱 더 조심조심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내리막길에 돌멩이가 많아 더 이상 샌들을 신고 걸을 수가 없어 트레킹화로 바꿔 신었다. 날은 덥고 히트텍까지 입고 있으니 발이 너무 뜨겁고 아팠다.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언덕을 내려와 만난 마을의 첫 번째 바에 들어가 시원한 콜라를 시키면서 얼음을 부탁했다. 얼음을 손수건으로 감싸서 발에 올려두니 조금 나아졌다. 발이 아파서 신발도 자주 바꿔 신고 걸음이 늦어지는 나로 인해 우리 모두 속도가 느려졌다. 예약한 알베르게는 정해진 시간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 시간안에 목적지에 도착하는게 어려울 것 같은 우리는 바 주인에게 전화를 부탁했다. 흔쾌히 전화를 걸어 늦게라도 도착할 거라고 얘기해준 주인 아주머니는 정말 친절했다.
_순례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순례자들을 도와주려 애쓴다. 전세계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다 보니 순레길 위 작은 마을은 순례자가 먹여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유명 관광지에 사는 사람들은 관광객들로 인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상황도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친절히 도와주려한다. 그저 마을을 유지하는 돈벌이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물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며칠이긴 하나 지금까지 만난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우리는 다시 힘을 내서 푸엔테 라 레이나로 향했다. 작을 마을들을 거쳐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
우리가 머물 침대는 계단을 올라가야 있었다. 올라가는 것까진 괜찮은데 계단을 내려올 땐 마치 스쿼트를 100개 한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우리 침대 맞은편에는 아까 바에서 만난 아저씨가 벌써 도착해 쉬고 계셨다. 마침내 히트텍에서 벗어나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테라스에 나가 스트레칭을 하고 썬베드에 누웠다. 발이 너무 아파 마을을 둘러보러 나가기도 힘들었다.
검색창을 열고 발증상에 대해 검색을 하며 마음 속 두려움을 키웠다. 분명 원래 신던 신발 사이즈보다 큰 사이즈로 사서 왔는데 뭐가 문제일까? 발뒤꿈치에서 발목으로 올라가는 부분이면 아킬레스건인가? 아킬레스건이 아프면 샌들을 신어도 아플텐데 왜 샌들은 괜찮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아프지 않고 무사히 걷길 바랐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일은 비 소식도 있으니 무리하지 말고 버스를 타고 가야할 것 같아 버스 시간을 알아봤다. 다행히 내일 목적지인 에스테야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고 그전에 약국이나 병원에 가볼 시간적인 여유도 있다. 물집과 베드 버그가 가장 무서웠는데 발이 아플 줄이야. 생각도 못 했다. 오히려 무릎이 아플까 걱정이 돼 무릎보호대를 챙겨왔는데... 이 길만 걷고 앞으로 안 걸을 게 아니니 조심해야한다. 괜히 욕심내면 더 악화될 수 있으니까. 아직 초반이니까 후반을 위해서라도 내일은 쉬어가야지. 스페인에서 버스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생각하려 노력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고 벌써 아쉽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보니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다. 오늘 저녁은 순례자 정식을 사먹기로 했다. 그런데 J 언니가 너무 몸이 안 좋아서 식사를 못하겠다고 했다. 오늘은 나도 아프고 언니도 아픈 날. 가지고 있던 약을 전해주고 K 군, 새로 합류한 아저씨까지 알베르게 근처 식당으로 갔다. 순례자 메뉴는 10-12유로 정도로 전식, 본식, 후식까지 코스로 나오는 저렴한 메뉴다. 다양한 메뉴가 있어서 먹고 싶을 건 선택하면 되는데 직원이 열심히 음식 설명을 해준 끝에 우린 각자 먹을 메뉴를 골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내 마음과는 다르게 무척 평화롭다.
오늘은 순례를 시작하고 가장 힘든 하루였다. 여전히 행복하다는 기분이 제일 크지만 자꾸 바뀌는 감정을 따라가기엔 육체가 너무 힘들다. 오늘은 내가 내 두 발에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의지로 따라나선 것도 아니고 주인을 잘못 만나 한 달 내내 고생해야 하는 내 두 발. 고맙고 소중한 내 두 발. 안쓰러운 내 두 발. 아직 초반인데 몸이 아파 걷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허탈하고 속상하다. 내일 쉬고 나면 다시 걸을 수 있기를, 나에게 이 길이 허락되기를 바라본다.
많이 피곤한 하루. 일단 푹 자야지. 결국 모든 것은 내 선택임을 잊지 말자. 내 마음이 가는 데로 따라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