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소리를 듣다.

2018년 5월의 일상_04.수비리->팜플로냐

by 에이치영

3일 차: 수리비 -> 팜플로냐_07:30 ~ 14:00 (22km)

오늘은 까미노를 시작하고 처음 만나는 도시, 팜플로냐에 가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조용히 침낭 안에 짐을 가득 넣고 나와 바깥 공간에서 배낭을 꾸렸다. 출입문 바로 앞 침대에서 잠을 자서 다른 사람들을 깨우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 잠을 푹 자고 일어나 컨디션은 좋아졌지만, 신발을 신으니 발뒤꿈치가 계속 아팠다. 오늘은 고도차가 거의 없는 평지라서 트레킹화 대신 스포츠 샌들을 신고 걷기로 했다.

알베르게에서 나오니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알베르게는 순례길 위에 있는데 알베르게를 지나 걸어도 다른 순례자는 보이지 않았다. 순례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걷기 때문에 구글 지도를 보면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갔지만 도로를 따라갈 뿐 인도는 나오지 않았다. 우린 잠시 걸음을 멈춘 뒤 다른 순례자가 보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알고 보니 어제 우리가 건너온 다리를 다시 건너가야 순례길이 나오는 거였다.

<수비리의 아침 풍경>

숲 속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신나게 휘파람을 부는 할아버지가 뒤따라 오시며 내는 소리였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가 멋진 소리라고 말씀드렸다. 작지만 뚜렷하게 들리는 기분 좋은 소리에 통증으로 힘든 마음마저 사라졌다.

우리는 첫 마을인 라라소냐에서 잠시 쉬기로 하고 순례길에서 벗어났다. 다리 위에서 배낭을 벗고 쉬려는 그때, 내 신발 한 짝이 없어진 걸 알게 됐다. 순간 정말 당황했다. 아침에 샌들로 갈아 신고 트레킹화는 배낭에 안 들어가서 신발 끈으로 묶어서 밖에 매달고 다녔는데 끈이 그만 풀리고 말았나 보다. 다시 돌아가면서 찾아봐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어떤 할머니께서 내 신발을 들고 찾아오셨다. 알고 보니 아까 휘파람을 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라라소냐는 순례길에서 조금 벗어난 마을인데 신발을 찾아주려고 그 길로 들어오신 거였다. 우리를 뒤따라 오시면서 신발이 떨어진 걸 봤는데 나를 불러도 내가 못 듣고 계속 걸어갔다는 얘기를 하시는 것 같았다.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무차스 그라시아스”라고 인사하는 일행에게도 고마웠다. 까미노 길을 걸으면 누구나 자기만의 천사를 만난다고 했다. 오늘 그 두 분이 나의 천사였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손짓으로 마음을 전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무사히 길을 끝마칠 수 있도록 기원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경황이 없어 성함도 못 여쭤보고 사진도 같이 못 찍어서 많이 아쉽다.

신발도 찾았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출발. 처음으로 해가 쨍하고 나왔다. 순례길을 준비하며 본 사진처럼 내 그림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찍은 우리 세 명 단체사진.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을 마주치고 바람과 해를 느끼고, 비록 발은 아팠지만 기분은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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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가기에 아침이면 내 앞으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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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들어가면 예쁘게 장식을 해놓은 집들이 많아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있다. 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순례자들이 많이 쉬고 있는 바가 보이길래 우리도 잠시 쉬기로 했다. 햇살이 좋아 야외 테이블에 앉았는데 닭들이 자꾸 먹을 걸 달라고 다가와서 무서웠다.

마을을 벗어나 만난 갈림길에서 양쪽으로 모두 노란 화살표가 있기에 어느 길로 가야 하나 고민할 때, 뒤따라온 순례자가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알베르게는 자기 알레르게 앞을 지나도록 일부러 노란 화살표를 그려놓는다고 알려주었다. 고마운 순례자 덕분에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만난 밀밭. 밀이 바람에 흔들려 파도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이 날 가장 마음에 들었던 풍경>

바람이 들려주는 밀의 소리를 들으며 팜플로냐 전 마을에 도착했다. 오늘은 다리를 자주 건너는 날. 이번에도 다리 위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양말을 벗고 쉬었다. 발에 물집이 생기는 걸 막으려면 발을 잘 말리는 게 중요하다고 해서 우리는 1시간을 걷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화장실을 찾기 위해 다리를 건너 들어간 곳은 작은 성당이었다. 세요도 있었는데 세요는 알베르게나 바, 성당에서 순례길을 걷는 사람에게 찍어주는 도장이다. 순례자 여권에 이 도장을 찍어 순례길을 걸었다는 걸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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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여를 더 걸은 뒤, 드디어 팜플로냐로 들어가는 다리를 만났다. 막달레나 다리라고 불리는데 엄청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팜플로냐 성벽과 성문을 지나 드디어 도시에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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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사전 지식 없이 길을 걷는 게 아쉬웠다. 특히나 팜플로냐는 헤밍웨이가 쓴 “태양은 다시 뜬다”라는 책에서 ‘산 페르민 축제’를 다룬 이후 무척 유명해진 도시다. 생전 작가가 자주 찾았다는 ‘카페 이루냐’가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후에 부모님을 모시고 올 때는 성당이나 건축 양식, 도시 유래를 공부하고 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어제 숙소가 조금 불편해서 오늘은 평이 좋은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팜플로냐 성당 바로 옆에 있는 곳인데 깔끔했다. 각자 배낭을 넣어 보관할 수 있는 라커도 따로 있어서 협소한 공간을 잘 쓸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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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바라본 팜플로냐 대성당>

우리는 샤워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맥주를 한잔하러 가기로 했다. 맥주를 좋아하진 않지만 기분을 좀 내보고 싶어 핀초와 함께 한 잔 마셨다. 핀초란 바게트에 각종 재료들을 올려놓고 이쑤시개 같은 걸로 고정시킨 간단한 음식이다. 그중 나는 계란이 들어있는 핀초를 주문, 바게트 빵이 좀 딱딱했지만 담백하고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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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배를 채우고 저녁을 해 먹으려고 다 같이 장을 보러 갔다. 역시 힘든 날은 고기라며, 고기를 구워 먹자고 얘기했는데 막상 부엌을 보니 아파트처럼 거실과 이어진 오픈된 공간이었고 어제와는 다르게 너무 시설이 깔끔해서 망설여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다 보니 고기 굽는 냄새를 싫어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살짝 고민했지만 고기를 포기할 순 없기에 목살과 삼겹살을 조금씩 사고 샐러드와 내일 간식거리를 사서 왔다. 저녁거리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도시 탐방을 하러 나섰다. 신기하게 샌들을 신고 걸으면 발이 별로 안 아팠다. 그리고 힘이 들긴 하지만 언제 또 와보겠냐는 마음이 커서 거리로 나갔다. 제일 먼저 숙소 앞 대성당에 들렀다. 입장료가 있었고 세요를 찍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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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같던 팜플로냐 대성당>

팜플로냐 성당은 크고 웅장했다. 전시실까지 둘러보는데 40-50분 정도 소요됐다. 성당 내에서 울려 퍼지는 성가가 자연스레 신앙심을 느끼게 해 줬다. 엄마, 아빠가 오시면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매일 든다. 저녁 미사가 끝날 무렵 다시 갔는데 오랜만에 보는 미사라 기분이 묘했다. 언젠가 이 길 위에서 꼭 한 번은 미사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성당을 둘러보고 나와 골목골목 구경하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역시 난 맥주보단 아이스크림이 좋다. 주말이라 마을 광장에서 마치 축제처럼 사람들이 모여 음악과 춤과 술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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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들 역시 흥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아이와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들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연령을 불문하고 다 같이 이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 역시 잠시 그들 틈에서 그 기분을 느껴본다. 모두 행복해 보이고 순간을 즐기는 듯하다. 물론 스페인의 다른 대도시는 서울과도 같을 수 있겠지만.



이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서 좋다. 눈이 마주치면 인사하고 웃는다. 그 모습에 나 역시 미소 지으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풀린다. 순례길 위에 사는 사람에게 순례자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 하루다.

나도 여기 있는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여유를 가진다. 그리고 내 몸을 더 챙기고 살피게 된다. 서울로 돌아가면 지금 내 모습과 마음은 다시 사라지겠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거 아닐까? 하루하루 많은 생각과 나를 알아가려 애쓰는 것보다 지금은 길 위에서 느끼고 보고 만나는 그 모든 감정이 좋다. 마냥 행복하다.

내일은 발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본다. 그리고 항상 기도하듯이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하길, 건강하길.

이 길 위에서만큼은 나도 기도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