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의 일상_03. 론세스바예스->수비리
2일 차: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_07:15 ~ 14:00 (21.5km)
둘째 날 아침, 불이 켜지기 직전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2층 침대에서 떨어지며 난 소리다. 아마 어두운 곳에서 내려오려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 같다. 깜짝 놀라며 괜찮다고 묻는 사람의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피레네를 넘은 여파가 오늘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리는 천근만근이고 배낭을 짊어진 어깨는 배낭을 메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아프다. 아마 저분도 그렇겠지.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려고 하는데 곧 불이 켜지고 봉사자분들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순례자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멜로디에 “굿모닝 굿모닝 까미노 웨이팅 포 유~ ”라고 부르는 노래는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쉬웠다. 봉사자분들 덕분에 아주 유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서둘러 배낭에 대충 짐을 넣고 식당으로 내려와 다시 꾸렸다. 침낭을 넣고 배낭을 챙기는 일이 아직은 더디고 어렵기만 하다.
밖으로 나오니 쌀쌀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혹시 비가 오진 않을까 불안해하며 길을 나섰다. 횡단보도를 건너 론세스바예스를 벗어나는 길에 많은 사람이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바로 처음으로 만나는 산티아고, 목적지까지 790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이다.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거리를 눈으로 확인하니 과연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는 생각이 든다. 표지판을 지나며 옆쪽 들판을 보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얼굴이 까만 양들이 많았다. 표지판 대신 귀여운 양 떼 사진을 찍고 걸음을 재촉했다.
수비리로 가는 길목은 마치 숲 속을 산책하는 분위기였다. 어제 내린 비로 곳곳에 진흙탕이 있었지만 이른 아침이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슬쩍 피해 갔다. 곧 첫 번째 바가 보였는데 대부분의 순례자가 아침을 먹는 곳이라고 한다. 이미 사람이 많아 우리는 그냥 지나쳤다. 조금 더 걸어가니 아침 일찍 문을 연 슈퍼마켓이 있어 간식거리를 사러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 인생 최고의 바게트를 먹을 수 있었다. 가볍게 먹을거리를 골라 계산을 하고 나올 무렵에 슈퍼에 바게트 배달이 왔는데 이걸 J 언니가 놓치지 않고 산 것이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고 거기에 따뜻하기까지 한 바게트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맛의 바게트였다. 우리는 바게트를 나눠 먹으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다신 이 날의 바게트처럼 맛있는 빵을 먹지 못했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이제와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계속 걷다 보니 발뒤꿈치가 아파왔다. 아무래도 어제 비가 내려 잠시도 쉬지 않고 높은 산을 넘는 바람에 왼쪽 발뒤꿈치가 부어서 신발에 발이 꽉 끼는 듯했다. 그나마 어제보단 오르막 내리막 경사가 심하지 않고 중간중간 마을이 있기에 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처음으로 만난 마을 입구 벤치에 앉아 신발을 벗고 과일을 먹으며 잠시 쉬다가 다시 걸었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비의 냄새를 맡으며 계속 숲 속 길을 걸었다. 발이 아프긴 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비 온 뒤라 그런지 길가에 민달팽이도 많이 보였다. 그 녀석들을 밟지 않기 위해 발 밑을 보며 걷다가 눈 앞에 바가 보이길래 잠시 들어가 쉬기로 했다.
바람이 꽤 부는 추운 날씨여서 우리는 안쪽에 자리를 잡고 카페 콘 레체와 또르띠야를 주문했다. 카페 콘 레체는 카페라떼고, 또르띠야는 감자와 계란으로 만든 오믈렛이다. 평소 카페인에 취약한 나지만 추울 때 마시는 따뜻한 커피는 온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찐한 커피와 담백한 오블렛을 함께 먹으니 어울릴 듯 말 듯 오묘하게 잘 어울렸다. 한동안 얼었던 몸을 녹이며 쉬던 우리는 다시 신발끈을 조여매고 길을 나섰다. 마을을 지나고 언덕을 넘으니 귀여운 양들이 우릴 반겼다.
드디어 수비리 도착. 이곳에서 제일 좋은 평을 받은 알베르게는 만실이었다. 근처 사립 알베르게도 둘러봤지만 오늘도 공립 알베르게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공립은 사립보다 저렴하게 묵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립은 대략 5유로, 사립은 8-10유로 정도였다. 어제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규모나 시설이 좋았기에 오늘 묵는 공립 알베르게가 더 안 좋아 보였다. 화장실은 방 밖으로 나가야 하고 더군다나 샤워 시설이 공중목욕탕처럼 남녀 구분만 되어있고 샤워기 4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구조였다. 다행히 언니와 나밖에 없어서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이곳은 식사를 만들어서 먹을 수 있는 작은 주방이 있어 저녁을 해 먹으려고 작은 슈퍼마켓을 찾아갔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스파게티 재료를 사서 토마토 스파게티를 해서 먹었다. 혼자 오신 한국 아저씨를 만나 함께 식사를 했는데 소방공무원으로 근무를 하시다 은퇴를 하고 오셨다고 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시를 지으셨다며 읊어주기도 하신 꽤 유쾌한 분이셨다.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외국 사람들은 어떤 요리를 해서 먹는지 지켜봤는데 같은 식재료를 써서 다르게 조리한 요리를 보고 있자니 재미있었다.
나는 몸살 기운이 있어서 맥주 대신 물에 타 먹는 감기약을 먹고 일찍 자려고 들어왔다. 아무래도 어제 비와 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몸살 기운이 온 것 같다. 이곳에선 내 몸이 건강한 게 최고라 몸 컨디션에 많이 신경을 쓰게 된다. 내 몸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보고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길을 걷다 J 언니가 사람들이 서로 길잡이가 되어주니 좋다는 말을 했다. 곧 성수기에 접어드는 길이라 앞뒤로 사람들이 꽤 많아 가끔 일행과 떨어져 걷더라도 외롭거나 무섭지 않다. 언니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어제와 오늘, 나는 제일 앞서가는 K 군과 J 언니를 보며 뒤따라 걸었다. 아마 내 뒤에 오던 사람들은 나를 따라 걸었으리라.
이처럼 인생에서도 누군가 내 앞에서 걸어가며 나를 이끌어준다면 어떨까? 과연 좋을까?
순례길은 갈림길이 나타나면 꼭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석이 있다. 그래서 화살표만 따라 걸으면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잠시 멈춰 서서 화살표를 찾으면 된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길에는 화살표가 없다. 그러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외로울 때, 힘들 때는 누군가 내 앞에 걸어가는 사람을 그냥 뒤따라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8살 때부터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문장이 있다.
이외수 작가의 ‘외뿔’에서 본 글인데,
“길이 있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것이다.”
이 문장처럼 내가 걷는 곳이 길이 되고 나도 누군가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일을 하며 후배들에게 길을 터준 선배가 됐을까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나는 훌륭한 길잡이 두 명 덕분에 길을 잃지 않고 외롭지 않게 잘 걸었다. 쓰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이젠 푹 자야 할 것 같다. 오늘은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을까? 푹 자고 일어나서 내일은 컨디션이 좋아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