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라는 설렘

2018년 5월의 일상_02.생장->론세스바예스

by 에이치영

1일 차: 생장 -> 론세스바예스 _ 07:00 ~ 14:30 (26km)

익숙하지 않은 2층 침대에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불편함이 아닌 설렘으로 푹 잠들 수 없어 일찍 눈이 떠졌다.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조용히 누워있었는데 마침 옆방에 머물던 단체 순례객들의 준비 소리에 슬슬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알베르게에서 준비해준 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갔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첫날부터 비를 만나다니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설렘이 더 컸다.

IMG_0411.JPG 순례길을 나타내는 바닥 표시

드디어 시작이다. 첫발을 내디디며 바닥에 순례길 표식이 있기에 사진으로 남겼다. 오늘은 첫날이지만 순례길에서 가장 힘들다는 피레네를 넘는 날이다.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나폴레옹 루트로 우리가 잘 아는 피레네를 직접 넘는 코스고 다른 하나는 발카를로스를 지나는 우회로이다. 어제 순례자 사무소에서 나폴레옹 루트로 가도 된다는 얘기를 들어서 갈림길에서 고민하지 않고 왼쪽, 나폴레옹 루트로 방향을 잡았다. 시작부터 오르막이다. 앞서가는 순례자를 따라 걷다 보니 비가 점차 그치면서 구름 깊숙한 곳에 있는 해가 보였다. 그 사이로 무지개도 보여 날이 갤 것 같다는 희망에 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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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을 취할 수 있는 오리손 산장까지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금세 숨이 차오르고 처음 메는 배낭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어려웠지만, 시작이라는 설렘 가득한 발걸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올랐을까? 앞만 보고 걷던 길, 바위에 배낭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는 외국인 순례자를 만났다. 꽤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어젯밤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K 군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평상시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찍지 않는데 지금 순간은 왠지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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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생존 신고를 하려고 찍은 사진을 보내드렸더니 내가 참 행복해 보인다고 말씀해주셨다. 사진에 내 기분이 함께 찍혔나 보다. 사진을 찍고 몇 걸음을 더 걸으니 오리손 산장이 보였다. 날이 추워서 안에 들어가 오렌지 주스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먹었다. 잠시 쉬다 보니 어젯밤 함께 묶었던 J 언니도 산장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우린 삼총사가 되어 다시 출발했다.

이때부터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할 때까지 비와 추위와 싸우며 걸었다. 차디찬 바람이 불었고 산 정상에서는 눈발이 날리기도 했다. 우박과도 같은 비가 끊임없이 내 얼굴을 때렸다. 그런데도 나는 걷는 내내 웃음이 났다. 형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힘든 와중에 눈을 마주치면 모두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내 선택으로 온 길이여서 모두 잘 해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만족하고 기쁜 마음을 가진 것 같았다. 날씨는 상관없었다.

산 정상쯤에 있던 푸드트럭은 잠시 쉴 곳과 따뜻한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대피소 같았다. 핫초코를 마셨는데 까미노를 걸으며 마신 것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맛있었다. 진짜 대피소도 있었지만, 나무 장작을 때서 연기가 매웠고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들어와 우리는 밖의 처마로 자리를 옮겨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초코파이를 나눠 먹으며 힘을 냈다. 아마 혼자였다면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찬 바람과 비에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결국 핸드폰은 바람막이 주머니에서 꺼졌다. 그래서 이날 사진은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오직 내 기억 속에만 저장되어 있는 풍경. 안개가 잔뜩 끼고 비가 내려 다른 사람들 블로그에서 봤던 피레네의 멋진 풍경을 보진 못했지만, 무지개도 만나고 안개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특히 내리막길에서는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 나올 법한 숲길을 걷기도 했다. 내리막길도 경사가 심했기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내려왔다. 그러다가 만난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크나큰 건물을 보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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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배정받고 씻으러 갔는데 찬물이 나와 너무 놀라긴 했지만, 알베르게 시설은 무척 깨끗하고 좋았다.

내가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 추운 날씨에 힘듦을 끝내고 돌아가 쉴 곳이 있다는 생각이, 그 목표가 오늘 우리를 끝까지 걷게 했다. 단순히 걷고 또 걷고 오르막에선 내 심장이 뛰는 박동을 느끼고 내리막에선 두 발에 고마움을 느끼고. 첫날이었지만 정말 단순해진 생활로 행복함을 느꼈다.

저녁 식사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했는데 생선 요리와 감자튀김이 맛있었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 성당에서는 8시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부님과 사람들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성당 특유의 분위기, 경건함과 엄숙함이 느껴졌다. 길을 걸으며 한 번쯤은 미사에 참석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성당에 다니진 않지만 모태신앙이니까.

내가 왜 이 길에 오게 됐는지, 무엇을 알게 될지는 30일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날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소중한 30일 동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걷고 듣고 느끼자.

하루였지만 점점 단순해지는 내가, 내 몸을 잘 챙기게 된 내가 좋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지 말자. 난 항상 빛나고 친절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오늘처럼 힘들 때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수고했어,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