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함을 느끼기 가장 좋은 방법

2018년 5월의 일상_11. 그라뇬->빌라프란카 몬테스 데 오카

by 에이치영

10일 차: 그라뇬->빌라프란카 몬테스 데 오카_07:20 ~ 15:35(28.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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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시작한 지 10일 차. 30일 일정으로 걷고 있으니 1/3 이 지났다. 오늘이 벌써 토요일이라니 마냥 걷다 보니 날짜 개념이 없어진다. 며칠째 걷고 있고 언제 출발하고 언제 도착했는지만 기록하게 될 뿐. 알베르게에서 주는 아침 식사 역시 훌륭했다. 맛있게 먹고 다른 때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다. 오늘은 비 예보가 있어서 조금만 걸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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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을을 자주 만난다. 그리고 오늘은 라 리오하 주를 넘어 레온 주로 넘어가는 날이다. 벨로라도까지가 라 리오하 지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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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로 마을을 만날 때쯤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쉬면서 우비를 입으려고 마을 안 큰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아저씨 한 분이 오셔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 마을은 아저씨 고향이고 도시에서 일을 하시지만 주말이라 집에 오신 듯했다.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질문은 한국이 왜 자살률이 높은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외국 사람들과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나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손, 발, 번역기까지 동원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마무리하면서 아저씨는 잠시 기다렸다가 빵과 수프를 먹고 가라고 하셨다. 어제 산토 도밍고에서 본 축제를 기념해서인지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 주민들에게 빵과 수프를 무료로 나눠준다고 했다. 어쩐지 마을 초입에서 어떤 차에서 냄비에 음식을 받던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차를 따라가라고 손짓하셨는데 그게 이 차를 따라가서 먹고 가라고 하신 거였나 보다. 마침 마을회관은 나무 앞에 있는 건물이었고 우리는 첫 손님으로 들어가서 빵과 수프, 포도주를 감사히 받아서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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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수프 안에 들어있는 고기도 부드러웠고. 동네분들도 정말 친절하셨다. 까미노 위에 있는 마을이어서 그런 지 동네 사람들도 외국인, 순례자에게 호의적이다. 맛있게 먹고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맛있고 따뜻한 음식을 먹어서인지 몸도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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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벨로라도에 도착할 때쯤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멈춰야 할까? 오늘까지는 평지를 걷는 일정이지만 내일은 산을 넘는 일정이 있어서 고민이 됐다. 일단 잠시 쉬면서 결정하기로 하고 바를 찾아 나섰다. 비가 와서 마을을 많이 둘러보진 못했지만 조용하고 예뻤다. 하루 머무르기에 딱 좋은 마을이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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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광장은 신기하게 생긴 나무들과 우리나라 정자 느낌이 나는 쉼터가 있었다. 우린 일단 광장 근처 바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카페 콘 라체를 마시면서 다음 마을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주인분께 오늘 가려는 알베르게 예약을 부탁했는데 친절하게 전화로 예약을 해주신 덕분에 마음 편하게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다행히 오후엔 비가 그쳐서 환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나보다 발걸음이 빠른 K 군이 항상 앞에서 이끌어주고 내가 뒤따라 가는 편인데 벨로라도를 나서면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이 날이 걸으면서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누던 때가 아니었을까. 우린 이야기를 나누다 다음 마을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마을을 지나쳐서 나가야 했는데 자연스럽게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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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을 되짚어 나가 화살표를 찾았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평지였는데 내일 넘을 산의 영향권인지 오르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벨로라도에서 빌라프란카까지는 12km 정도 떨어진 거리라 대부분 벨로라도에서 머무르는지 이후 길을 걷는 동안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길게 뻗은 오르막을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 영국인 그레이엄을 만났다. 그는 어제 그라뇬으로 가는 언덕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이틀 전에도 길을 걷다 넘어진 캐나다 할머니를 만났었는데... 아무래도 더운 오후에 무거운 배낭까지 메고 길을 걷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레이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다가 나는 구름이 정말 예뻐서 사진을 찍으며 더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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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길과 초록빛 밀밭, 노란빛 유채꽃, 하얀 구름이 정말 아름다웠다. 다리가 아팠지만 멋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며 걸었던 시간. 하지만 오후가 되면서 바람도 더욱 거세지고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는 도착지에 지쳐갔다. 다음 마을에서 K 군은 잠시 바에 들러 쉬었고 나는 성당 앞 벤치에 앉아 바나나를 하나 먹고 길을 걸으며 생각보다 맛이 없는 젤리를 먹었다. 하리보 젤리였던 거 같은데 특히 검은색 김밥처럼 생긴 젤리가 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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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안 보이는 길을 걷고 걸어 드디어 빌라프란카에 도착. 오늘은 호텔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를 예약했다. 내가 처음으로 K 군보다 먼저 도착한 날. 이날부터 K 군이 정강이 쪽이 아프다고 쉬엄쉬엄 걸었다. 확실히 일주일 넘게 걸으니 몸에 피로가 쌓이고 있다. 혼자 걷다가도 항상 내 앞에서 걸어가는 K 군을 보면 안심이 되곤 했는데 오늘은 앞에 아무도 없으니 목적지가 더 멀게만 느껴졌다. 이틀 전 나헤라로 가는 길 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무서웠다고 말하던 내게 J 언니가 조금은 멀지만 뒤에는 자신이 걷고 있다고 말했다. 함께 걷지는 않지만 앞에는 K 군이 뒤에는 J 언니가 있다. 우린 다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그저 길을 걷고 있는 위치만 다를 뿐이다. 각자 사연을 갖고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이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오늘은 지난번보다 덜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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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약간 미열이 있었다. 오전에 비를 오후엔 강한 바람을 맞으며 걸었더니 컨디션이 안 좋았다. 여전히 왼쪽 발목은 많이 부었고 발목 보호를 위해 붙인 파스 때문인지 빨갛게 두드러기처럼 일어났다. 이제 겨우 열흘인데 앞으로 20일 동안 잘 걸을 수 있을까? 오늘도 약 30km 정도를 걸었는데 30일 일정이다 보니 앞으로 더 많이 걷게 될 날이 있을 텐데 걱정이다. 자주 쉬면서 걸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걷다 보면 통증이 덜 느껴지기도 하고 욕심이 나서 쉬지 않고 묵묵히 걷게 된다. 발목을 위해서라도 잘 쉬어야 하는데 아직은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씻고 나오니 이제야 발목 통증이 강하게 느껴진다. 호텔 바에서 얼음을 얻어와 발목에 대면서 쉬었다. 다리가 아프니 마을 구경은 꿈도 못 꾸고 슈퍼에도 가지 못했다.



걷기 시작하는 첫 주는 걷는 게 익숙하지 않고 힘들지만 경치가 아름다웠다. 언덕을 오르면 그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두 번째 주는 걷는 것도 익숙해지고 조금 덜 힘든 코스지만 몸에 피로가 쌓이고 가시거리가 어마어마해서 도착해야 할 마을이 보이는데 쉽게 도착하지 않으니 오히려 쉽게 지치게 된다. 그래서 나에 대해, 내 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1km를 걸어도 4km를 걸어도 같은 풍경을 보게 되니 시선이 외부로 향하는 게 아니라 내 안으로 향하는 기분. 오늘 무리해서 산 밑까지 걸어왔으니 내일부터 부르고스까지 가는 이틀은 20km 정도만 걸으면 된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가보자. 몸이 하루빨리 나아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