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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Jun 17. 2024

差異

생각하는 것이 같지 아니하고 다르니까 같은 마음이나 情을 나누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인연과 오랜 세월은 차이를 인정하면 서로를 위하는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생각이 같으면 좋지만, 차이도 있다는 현실이 불편한 사이로 가기도 쉽다. 그래도 끝까지 살아가야 하는 인연이 있다. 그런데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목포나 생각을 존중한다면, 갈등까지 가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것도 삶이다. 

여기서 바람이 지나치거나 강요가 있어서 갈등이 오래되거나 인연까지 중요하지 않은 신념이면 만나지 않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마음으로 느끼고 생각들이 쌓여서 형성된 가치관은 오랜 시간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변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개개인의 가치관도 삶의 진행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바뀔 수도 있다. 

一生은 의도하지 않은 생명의 시작으로 인연이 생기고 여러 관계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기력이 다하거나 다른 원인에 의해서 사는 것을 마감하는 것이다. 


평소에 생각한 것이 수많은 사람이 다녀간 여기서 각자는 그중 하나다.

이름 없는 전쟁터에서 소리 없이 죽어 간 소년병, 열심히 살면서 다른 사람의 본이 되게 사신 분, 악인이나 졸지에 사고로 죽은 분이나 여러 가지의 삶을 살다간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잊히는 존재들이다. 차이가 있다면 길고 짧은 차이다. 그런 사실을 상수로 믿고 사람의 일생이나 존재에 의미보다는 한번 왔다가 가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러한 사고는 염세적인 면이 있지만, 받아들인다. 그래서 지금은 욕심도 없다. 

현재의 삶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죽음이다. 멀지 않은 그것을 마음준비를 하는 것이다. 요즈음 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죽음은 “자신도 예상치 못하는 돌연사” 라고 한다. 

여기서 내세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 종교에서 내세는 영원하고 행복이 계속되는 세상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영원한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어쩌면 지겨운 일이다. 


지금은 조용하면서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마무리를 준비하는 삶이 최선이다. 늘 생각했듯이 마무리를 반복적으로 정리해서 변하지 않는 사고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누가 말했듯이 저승사자가 가자고 하면 쉽게 일어나서 따라가는 준비를 늘 해 놓고서 사는 것이다. 즉 주변 정리를 하고 심지어 청소까지 깨끗하게 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남은 사람들이 고민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마감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없고, 그저 현재 살아있을 때 감정일 뿐이다. 


그렇지만 늘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善을 베풀면서 마감하겠다는 마음이다. 나름의 방향이 나왔는데, 다른 방향으로 가자고 하는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내 생각과 맞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분들은 믿음의 사고와 생각은 확고하고, 그 삶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삶이 옳고 내 삶이 옳지 않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반대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의 삶이니까 인정하고 살아가면 된다는 마음이다. 즉 차이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들이 자기의 신앙을 강요하면서 믿음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만난다. 신앙의 믿음으로 나를 구원하고 나의 삶을 위해서 진지하게 기도하고 바라는 마음을 느낀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연을 유지하려면 그분들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편하고, 신앙의 교리에 따라 마무리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관계로 신앙을 요구받는다

선한 마음이고 간절한 믿음이지만,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가치관과는 다르다. 나쁜 일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의 마음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관적인 신념이 강한 사람들로 내 머리는 간주한다. 


어느 순간에 성령이 임해서 독실하게 믿는 자로 변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변한들 지금 같은 마음에서는 삶에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런 성령이 내 사고에 들어올 가능성이 지금은 없다. 

영원히 사는 것을 지겨운 생각을 하는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에게는 영생은 의미 없다. 행복과 기쁨이란 것도 그 반대가 있어야 느끼는 인간의 감정이다. 사후에 좋은 곳은 영원히 행복하고 즐거운 곳이다.


그렇지만 형제가 진정성을 가지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하고 신앙의 선한 교리를 말할 때는 내 감정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신앙의 선한 말씀을 반복하면서 성령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적으로 나를 위한 진정성에 감동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들의 말에도 내 생각과 다른 것이 분명히 보이고, 내 생각을 바꿀 정도의 논리나 감동은 아직 느끼지 않는다. 모든 사고나 가치관이 굳어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형제나 자식이 바라는 믿음과 구원에 논리를 반박하지 않는 것은 그분들에 대한 감사와 인연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이 그분들이 생각하는 것으로 가지는 않았다. 


매일하는 신앙의 학습과 만남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인생의 마무리를 편하게 하고 싶다는 의미도 있다. 

마음은 가지 않더라도 몸만 가던지, 아니면 영원히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면 되는 것이다. 마음이 동하지 않으니까 노력하는 것이고, 삶의 인연을 부드럽고 앙금 없이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솔직하게 내 마음을 인정받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형제나 자식은 내가 진정으로 그들의 믿음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확고하다. 그런 마음에서 내가 변하지 않으면 실망은 할 것이다. 내의 행동이나 말들이 그들의 믿음을 부정하거나 기분을 거슬리지 않는다면, 인간의 情으로 나를 내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제는 어릴 적에 같이 자란 친구가 “성경 이렇게 읽고 통달하라”라는 서책을 등기로 보내왔다. 같이 살면서 바로 옆에서 같이 큰 친구였다.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투병 중에서 신앙이 깊어 그 믿음으로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육신이 아프니까 의지할 믿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인 것 같다. 믿음이 희망을 주고 현재의 고통을 줄여 준다면 친구의 선택은 옳은 것이다. 

예전에 교회에 열심히 나간 것으로 나를 기억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통해서 교회에도 가지 않고, 믿음도 없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워서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귀한 책을 보낸 것이다. 


현재는 형제와 자식이 믿음을 강요하고 열심히 정성을 다하고 있는 시절에 다시 친구가 믿음의 길로 가라고 책을 보내고 있다.

믿음이 지금 여러 곳에서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조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믿음의 길로 가지 않더라도 나와의 인연은 단절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믿는 자는 믿는 자와 교류하고 다른 부류와도 지금까지의 인연은 끊지는 않아야 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믿음에 열심히 하면서 생각의 차이도 인정하자는 것이다. 


차이는 긴 인류사에 살아간 사람이나 앞으로 살 사람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듯이, 차이도 한번 살다간 각자 사람의 개성이다. 그런 차이가 갈등과 같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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