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를 걷다

​1. 거리의 사찰과 숨은 교회: 권력과 신앙이 빚어낸 한일의 대비

by 진주

아침부터 보슬비가 텐진 시를 적신다. 거리는 아직 분주하지 않고, 아스팔트 위를 톡톡 두드리는 빗방울을 친구 삼아 승립사(勝立寺, Shōryū-ji)로 향한다.

후쿠오카는 일본 남서부 규슈(九州) 섬의 주요 도시다. 도시의 중심가인 텐진(天神)이라는 이름은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모신 신사에서 유래한다. 미치자네는 헤이안 시대 말, 궁정에서 권력을 쥐고 정치를 주도했으나, 정적인 후지와라 가문의 모함을 받았다. 결국 901년 그는 ‘좌천(左遷)’이라는 형식으로 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로 유배되었는데, 이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완전히 격리되는 정치적 조치였다. 미치자네는 유배지에서 가혹한 생활과 심리적 고통을 겪다 903년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교토에서는 천재지변과 귀족들의 죽음이 잇따랐고, 사람들은 이를 그의 억울한 원혼(怨霊)이 일으킨 것이라 믿었다. 이에 그의 영혼을 달래고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미치자네는 학문과 문도의 신인 '덴진(天神)'으로 추앙받으며 숭배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를 모신 다자이후 텐만궁이 세워지고, 이 신사의 이름이 지역명까지 바꾸게 된다.

아침 안개가 걷히듯 역사는 늘 흥미로운 대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의 절이 깊은 산중에 숨어 있다면, 일본의 절은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있다. 후쿠오카만 해도 도심 곳곳에서 교회나 십자가를 쉽게 볼 수 없고, 크고 작은 사찰이 여기저기에 공존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지리적 배치가 아니라, 종교가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왔는지 잘 보여준다.

통치 시스템 속의 불교

일본의 사례 조선 시대의 불교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정치 체제에 밀려 산속으로 물러났다. 수행과 속세의 거리를 강조하며, 종종 세상과 등을 진 듯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반면 일본의 사찰은 달랐다. 에도 시대에도 도시 중심부, 시장 곁, 길모퉁이에 버젓이 서 있었다.

에도 시대(1603~1868)는 도쿠가와막부가 260여 년간 일본 전역을 통제하며 장기적인 평화와 안정(팍스 도쿠가와나)을 유지했던 시기다. 막부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신분 질서를 공고히 했고, 불교를 이 통치 시스템의 핵심으로 활용했다.

승립사처럼 잘 정돈된 사찰과 정원을 둘러보면, 그 건축 구조가 마치 도심 속 가정집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크고 화려한 단청 대신, 오래된 낡은 목조 건물과 청동색 종만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절은 단지 예불의 공간을 넘어, 출생과 사망을 기록하고 매장을 집행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실질적인 생활 행정 기관 역할을 했다. 특히 에도 시대에는 모든 국민이 특정 사찰에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하는 단가 제도(檀家制度)를 통해 종교가 국가의 통치 기구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16세기말,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일본에서는 종교가 논쟁으로 다뤄졌다. ‘불교와 기독교 중 어느 쪽이 진리인가’라는 주제로 사찰에서 담론 대결이 벌어지기도 했다. 승립사(勝立寺, Shōryū-ji)가 바로 이 역사적 승리를 기념하는 상징적인 장소다. 일본의 불교는 이 승리를 통해 권력의 공인을 받아 도시의 중심에 자리 잡았으며, 이는 기독교와의 종교적 헤게모니 싸움에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이 역사적인 담론의 구체적인 과정은 3부에서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만약 그 담론의 결과가 달랐다면 어땠을까. 도쿠가와막부는 ‘하느님께 충성하라’는 가르침을 위험하게 여겼고, 결국 금교령을 내렸다. 이후 일본의 기독교는 숨어야 했고, ‘가쿠레 기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만 명맥을 이었다.

억압을 뚫은 힘

일본과 한국의 기독교 대비 에도 시대 이후 기독교는 일본 사회에서 주류가 되는 데 실패했다. 2022년 일본 문화청 통계 기준, 기독교계 인구는 전체의 약 0.8%에 불과하다. 이처럼 극소수의 신자 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기독교는 교육, 사회 복지, 의료, 도덕 및 윤리 등 사회 다방면에 걸쳐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하며 그 영향력은 결코 1%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문화, 특히 선조 숭배 문화와의 충돌은 기독교 확산의 큰 장벽으로 남아있다.

반면,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기독교가 혹독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결국 뿌리내려 거대한 주류 종교로 성장했다. 한국의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친 기독교 인구 비율은 (조사 기관별 편차가 있으나 2024년 기준) 약 28%에서 31%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한국 사회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는 조선에서 억압 속에서도 다음의 과정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계급 평등사상: 양반 중심 사회에서 배제된 여성, 천민, 농민에게 기독교의 평등사상은 해방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근대화의 동력: 개항 이후 기독교는 선교사들을 통해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며 근대 교육과 의료의 기틀을 다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민족 운동의 구심점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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