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스트가 아닌 그라데이션으로, 녹여내는 건축
예전에 새 둥지 사진이 찍고 싶어서 산림 공원 숲 길을 따라 걸으며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닌 적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새소리. 비적비적, 종달종달, 저마다 목소리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약은 녀석들은 내가 인근에 다가가기만 하면 바로 종적을 감췄고 결국 둥지는커녕 그 녀석들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둥지는 봤는데 그걸 찾지 못한 게 아닐까.
Outstanding, 예술가는 자신의 업적을 보여주고 싶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노출증 환자들과 같다. 단어 그대로 남들보다 높이 서서 돋보이고 싶어 하고 자신의 결과물을 도드라지게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예술은 콘트라스트가 강조된다. 주위의 다른 평범한 결과물들과는 다른 예술적 대비. 평범한 빌딩 숲 사이에 조성된 아름다운 녹지 공원, 네모 반듯한 현대식 아파트 사이에 구시대의 건축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형상의 미술관, 평화로운 마을 뒷동산 위에 세워진 공격적인 첨탑. 특히나 건축은 대비로 완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구마 겐고의 이름을 도쿄 하계올림픽에서 처음 들었다. 도쿄 국립경기장을 설계한 일본의 건축사, 자연주의 건축을 추구하는 인물, 과거부터 목조 건축에 대해 긍정적인 언사를 꾸준히 해온 인물이라는 점까지 요 근래에 보기 힘든 건축사라는 느낌은 확실하게 받았다. 그리고 그 기억의 선을 이어가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읽은 책이 그의 건축 철학을 담은 도서 『점 선 면』이었다.
'이게 21년에 발행된 도서, 그러면 과거 도서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까.'
이번 서평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개인의 직업윤리와 철학을 담은 도서들은 매년 남아돌만큼 자연스럽게, 그리고 많이 나오고 읽히는 분야다. 당장 국내에서 유명세를 탄 인물이 다음 달, 다다음 달에 개인 철학을 담은 도서를 출간하는 일은 예삿일이고(이런 이슈를 잡아 출판하는 편집자들이 굉장히 타이트한 일정을 가지고 일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유명세를 장기간 이어가는 저명한 저자 같은 경우 그의 철학을 담은 이야기가 몇 년에 한 번씩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도서들의 가장 큰 특징은 지난 도서와 비슷한 레퍼토리와 대본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점이다. 그 철학이라는 요소가 급조된 게 아니고서야 보통은 자기가 살아왔던 신념, 직업 정신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담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가, 역으로 이 부분이 독서 시에 주안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런 저명한 저자들의 도서를 읽을 때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과거와 현재, 과연 얼마나 그 시선이 바뀌었는가를 찾는 부분에 있다. 때로는 아무런 근거 없이 과거에 했던 주장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버리는 인물들도 있고 또는 근거를 가지고 과거에 했던 이야기에 대해 이런 부분은 정정하고 싶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렇기에 이런 도서들의 연속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구마 겐고의 도서도 비슷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이야기가 진행된다(『점 선 면』에 대한 간단한 서평은 8월 독서 리뷰/프리뷰에 적혀있으니 참고하면 더 이해하기 좋다). 도시의 발전, 경제 규모의 팽창, 일본의 버블 경제와 점점 비대해지는 건축 양식,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양의 문화와 무개성화된 콘크리트 건축 양식에 대한 무분별한 수입 및 활용에 대한 비판. 자신이 설계했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도 구마 겐고는 이런 직업 철학적인 부분들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다. 애초에 그는 버블 경제의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가 끝난 후의 상황까지 모든 순간을 눈에 담은 건축사다. 그렇기에 이런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건축보다는 이제는 지는 건축,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더 강하게 설파하는 것이다.
그의 자연주의 건축에 대한 지론은 재미있고, 또 신선하다. 극단적인 자연 건축, 그러니까 건축물의 미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연에 있는 재료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도 같은 건축 방식보다는 과연 어디까지가 자연에서 난 재료인가, 어디까지 우리는 용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을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작업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에 대한 현대식 타협, 그러니까 콘크리트 건물 외벽에 나무를 붙이는 수준의 건축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하며 스스로의 기준 선을 확실히 긋는 모습도 이번 도서를 통해 볼 수 있었고.
나는 코뮌 바이 더 그레이트 월 프로젝트를 할 때 특히 이런 고민을 했다는 점이 기억에 남았다. 대나무를 이용해 집을 지을 때 대나무의 강도와 건축물로서 지속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대다무를 특수처리한 다음 내부에 콘크리트를 채워 강도를 강화해 외벽으로 사용하겠다는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과연 이게 자연주의 건축인가? 이게 콘크리트 가건물을 세워 외벽에 대나무를 붙인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질문 속에 자연주의 건축에 대한 건축사 본인의 기준을 세워 설명하는 점, 어떤 의미에서는 도쿄 국립경기장을 지을 때 나왔던 수많은 설계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 답변하던 그가 비쳐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연주의 건축은 콘트라스트가 아닌 그라데이션이다. 주위 환경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하고 어제 있었던 것처럼, 내일도 있을 것처럼 당연하게 서있어야만 한다. 그렇기 위해 그는 조적조를 하더라도 주위에 있는 재료만을 최대한 사용하려고 하고 근처의 자연환경과 생태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애쓴다. 앞으로 그는 얼마나 더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며 지는 건축, 자연스러운 건축을 이어가려고 할까. 다음 도서도 비슷한 레퍼토리로 다뤄질 거란 점을 알면서도 눈으로 좇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을 빌릴 당시에 같이 도서관에서 빌렸던 도서가 『1995년 서울, 삼풍』이었다. 한 권이 건축사의 이야기라면 한 권은 건축물이 무너진 재난의 이야기였는데, 솔직히 두 도서 간 연결점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하나의 문장으로 두 도서의 연결점이 생겨버렸다.
노화의 정도를 표면에서 보기 어렵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내부에서 철근이 부식되고 있거나 혹은 콘크리트 자체의 강도에 문제가 생겨도 표면에서는 이것을 알아채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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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콘크리트의 으스스함은 그 내용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실제 이상의 압도적 강도를 가상하고 불안정성을 고정화하는 초월적인 힘을 기대하게 된다.
- 『자연스러운 건축』21p 일부 발췌
콘크리트는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어떤 무게에도 강인하게 버틸 것 같지만 그 허용 강도를 넘는 순간 당연하게도 다른 건축물처럼 무너지게 된다. 문제는 그 허용 강도를 넘는 순간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무는 썩고 부러진다. 돌은 깨지고 부숴진다. 하지만 콘크리트는 자신의 죽음을 노래하지 않는다. 늘 당연하게 있을 것 처럼 서있다가 갑자기 무너질 뿐.
콘크리트 건축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으스스함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책을 우연히 찾았고, 기분 나쁜 연결점을 우연히 찾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서울 아트북페어에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1995년 서울, 삼풍』을 읽었다. 바로 직전에 위 도서를 읽고 있어서일까, 슬픔, 두려움, 뭐라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