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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레맛곰돌이 Jun 21. 2024

16. 악인의 서사-돌고래

중학교 시절, 내가 즐겨했던 게임은 당시 유행했던 "메이플스토리"도 아니고 "던전앤파이터"도 아닌 "삼국지 조조전"과 같은 고전 게임이었다. 그중에도 즐겁게 했던 게임은 다름 아닌 "파이널 판타지"였는데, 동 이름의 시리즈가 이미 13편까지 나온 시절에 1편을 즐기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얼마나 옛날 게임을 하고 있었는지 가늠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2020년 이후 독자가 원하는 올바른 악당의 상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십중팔구는 파이널 판타지 1편 최종보스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것이다(아니면 드래곤 퀘스트 1편의 최종 보스 용왕일 수도). 그 시절 악당들이 가지는 세상을 향한 악의에 이유는 없다. 자신이 강하기에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혹은 힘으로 억압하는 사랑을 방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 발아래에 놓으려고 한다.


 어린 시절 왜 이런 게임이 재미있었을까. 일단 악역 때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중학생의 입장에서 공부는 열심히 해도 눈에 보이는 스탯으로 올라가지 않지만 게임은 당장 성장하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옛날에 TV에서는 게임중독의 이유에 대해 으레 이렇게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어른이 되고 난 후 이런 게임들이 왜 재미있었나 생각해 보면 막상 이런 이유 밖에 찾지 못하는 걸 보니 나도 진짜 아저씨가 된 모양이다. 실제로 당시 이런 게임을 할 때 '재미있으니까', 이상의 게임 플레이 동기는 없었다. 다음 마을에 가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고, 나는 그들을 돕는다. 새로운 마을에서는 새로운 강대한 적이 나타나지만 나는 성장을 하며 얻은 새 마법으로 적들을 쓰러뜨린다. 이런 단순한 구조에서 악인의 서사가 끼어들 구조는 없다. 악은 그저 쓰다 버리는 장기말처럼 내 검의 녹이 되면 충분한 존재일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턴가 이런 이야기가 싫어졌다. 악인도 착한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악인이라고 지칭할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그 사람도 사실 사정이 있는 또 다른 선한 인물이면 어떻게 하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은 과거 애니메이션 좀 보던 경력을 되살려 내 또래, 그러니까 이제 30을 앞두거나 이미 30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라면 알만한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한다. 과거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초능력과 마술, 종교가 판치는 세상에서 무능력자(으레 그렇듯 주인공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긴 하지만)로 살아가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뛰어난 능력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타인을 감화시키는 말솜씨였다. 그렇게 그는 만나는 악당마다 자신의 달변으로 상대를 감화시키고 정의의 주먹으로 후려쳐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그러면 그 후 악당에게 서사를 부여해 주고, 그 악당은 착한 사람으로 개심해서 주인공의 동료나 비슷한 위치가 된다는 식의 전개방식. 놀랍게도 이게 00년도 후반에서 10년도 중반까지도 가장 유행하던 스토리텔링 방식이었다. 지금 문화를 향유하고 의견을 공유하는 라이트의 경계를 넘어선 소비자들은 당시 유행했던 이런 일본식 스토리텔링 방식에 대한 반동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이유를 하나 찾자면 한국 사회 형법과 시민들의 법감정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법에 대한 불신, 사적제재와 자극적인 컨텐츠가 범람하는 사회 속 시민들의 교정주의적 시선이 엄벌주의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도.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는 무언가 퍼즐의 빈칸처럼 아쉬운 피스가 하나 남는다. '악인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과연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이야기다. 나는 작품을 소비할 때 주인공의 반동인물을 3가지로 정의하고는 했다.


1. 절대적인 악(ex. 태초부터 악으로 태어난 존재, 돌이킬 수 없는 악)

2. 서사가 존재하는 악(ex. 사회가 만든 악당, 사연이 있는 악당)

3. 또 다른 선


 1번은 서두에서 말한 게임의 최종보스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2번은 아까 이야기한 작품에서 주인공의 말에 감화되어 동료가 되는 자들, 그렇다면 3번은 어떤 인물일까. 나는 이런 인물들을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예컨대 작은 사회가 지키고 있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악으로 규정되었지만 그 테두리를 확장시켜 인간이 아닌 신과 같은 존재들의 세계까지 확장시키는 순간, 그러니까 인간의 법이라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순간 인간의 법으로는 악이지만 결과적으로 인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존재, 그리고 그 선한 영향력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신의 실존조차 증명하지 못하고 법이 절대적 테두리인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예시니까. 하지만 미디어에서는 가능하다. 특히 신이 존재하고 그 아래의 인간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라고 말하는 작품일수록 더더욱.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입장에서 감히 신을 속이고 제우스가 뺏어간 불을 인류에게 돌려보낸 악인이다. 하지만 인간의 시선에서 그는 앞날에 어둠뿐인 세상에 불을 선물한 선지자이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나는 애매하지만 또 다른 선이라는 분류를 하나 추가했다. 서사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는 인물, 반동인물이라는 말로 소모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소모되지 않을 수도 있는 인물.


 과거 내가 하던 게임에는 삼용사라 불리던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가 있었다. 여신의 뜻을 따랐지만 중요한 순간 버림받고 모든 것을 잃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을 도와준 마족들은 인간과 소통이 가능한 평범한 인물들이었음에도 공격당하고 뒤이어 자신의 고향땅마저 인간들에게 짓밟히면서 결국은 마족의 편으로 돌아선 자에 대한 이야기. 물론 후기로 갈수록 캐릭터성은 망가지고 이야기도 망가진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이 단락적인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전체 서사로 보자면 악이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의 편에 서서 움직이기에 선으로 해석되는 주인공과 선한 인물들이 모였지만 인간에게 악으로 규정되었기에 선의를 띈 악이 된 용사. 과연 누가 누구를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나는 스토리를 플레이하면서도 이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했다.


 책에서는 악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이야기를 보인다. 야만의 시대라 칭해도 되는 서부극에서 선과 악이 혼재된 상황 속 악의 규정, 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악에 대한 서사를 없애야 한다는 현대 소비자들의 의견 속 과연 악이라는 어둠이 없다면 선이라는 빛이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과거 작품 속 악인의 해석, 그리고 현대 웹소설에서 악인의 해석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과연 악인의 서사를 빼고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악인의 서사를 제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조하는 매력적인 악이 사회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야기에 답변하는 어려운 면은 피하면서 말하자면, 순수히 매력적인 스토리에는 매력적인 인물이 필요하고, 그 매력적인 인물에는 악도 포함된다고 말하고 싶다는 의미다. 그 인물은 위에서 말한 분류법 상에서 3번과 같은 인물이면 좋겠지만, 2번이나 1번이어도 충분하다. 매력적인 선역의 서사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시켜 더욱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매력적인 악역의 서사다. 서로는 서로를 비추면서 더 높은 경지에 올려놓게 되고 결과적으로 스토리를 풍성하게 만든다. 단지 그 정도 수준을 논할 스토리가 되지 못했기에 많은 이들이 '이 수준일 거면 차라리 악역의 서사를 빼라!'라고 말하는 거겠지만.


솔직히 이번 편은 정식 넘버링보다는 .5와 같은 느낌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흥미롭게,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풀어내보려고 했는데 막상 생각만큼 재미있게 풀리지는 않은 느낌이 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된 모양이고. 아마 일주일 뒤에 읽으면 부끄러울지도 모르고 한 달 뒤에 읽으면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그런 이야기니까.


 그리고 웹소설의 악인의 서사에 대한 파트를 읽다가 아는 이름이 나와서 놀랐다. 웹소설 작가이자 연구자인 김준현, 이 분 사이버대학교 전임 교수님이셨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인용문으로 뵙게 되다니... 예전에 전역 후에 편집자 쪽으로 일하게 되면 한 번 찾아뵈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아직 직장도 구하지 못했으니 찾아뵈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과거 해당 분야로 전직을 고려 중이라는 메일을 보내드렸는데 이에 대해 전화로 세심하게 상담해 주셨던 좋은 기억이 있는 분이었기에 찾아뵙고는 싶은데, 참 녹록지 않다.


 최근 6월이지만 날이 너무 더워 고통받고 있는데, 이제 여름 시작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한숨만 나온다. 이번 여름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 하지만 한편으로는 집에 새로 생긴 얼음정수기가 있기에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아무 근거 없는 용기를 키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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