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자, 나의 선생, 나의 사람에게
24살, 혜화의 밤들을 기억한다.
새벽까지 이어지던 당신의 강의를 기억한다.
내가 지금까지 본 누구보다 본질에 관심이 많던 당신,
나의 철학자.
나보다 무려 약25년이 앞선 통찰을,
논리정연히 뜨겁게 설명해내던 당신의 말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물론, 지금도 사랑한다.
이제는 특별히 사랑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마음에 생각에 진하게도 스며들어 나의 뼈대, 나의 살, 나의 일부가 되어버렸으니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토록 책을 읽었던 이유는 영화를 봤던 이유는,
도무지 현재의 나로서는 알아낼 수 없는, 이 정체 모를 혼란한 감정을 나대신 미리 발견해 예쁘게 정리해 설명해주던 그 말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내 마음같은 대사를, 구절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나만이 이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의 안도감이란,
비로소 삶의 다음 페이지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당신은 철학은 이과에게 있어서 수학과 같은 것이라 했다. 나는 문과와 이과의 차이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향성의 차이라 생각한다. 이과는 외부세계를 먼저 이해하고 깨달은 이치를 내면에 적용하는 반면, 문과는 내면세계의 이치를 먼저 탐구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자들이라고 본다.
우주의 공식을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이, 문학,사회,역사로 대표되는 인간의 공식은 철학으로 표현되는 것이라-, 당신은 내게 철학을 그리소개해 주었다.
사랑, 고독, 일, 꿈, 소비 등- 당신과 다룬 모든 주제들은 머리 깊은 속 간지럽던 내 내면의 세계를 어찌 알았는지 속속들이 관통하여, 자리잡던 헛생각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혼란한 어지러이 흩뿌려진 감정들을 새로 건설하며 오롯이 새로 심게 하였다.
한 주제만 빼고 ‘신(神)’.
당신이 신이 아닌데, 신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다는게, 또 누구에게 강의 할 수 있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는 모르면 말을 안하는 성격이니까.
내가 아직까지 보지 않은건 믿지 않는 주의니까.
나는 아빠가 법 얘기 할 때, 헌법 제27조 제4항 ‘무죄추정의 원칙’에 감동받던 아이었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90%의 사람이다.
낳아준 엄마랑도 의견이 매사에 다분한데 90%라니-.
그러니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사는게 바빠 오랜 시간 당신의 현재를 알지 못하고 지냈다. 그리고 약 6개월전.
오랜만에 찾아본 당신이 무척이나 말라있어,
삽시간에 심장이 1/3씩 발바닥 저변으로 내리 앉았다.
쿵-. 쿵-. 쿵-.
나의 스승이여, 나의 선생이여,
나의 친구여, 나의 사람이여,
부디 건강해 주소서.
부디 끝까지 살아있어, 당신이 그리도 간절히 찾던 세계의 남은 10%의 본질을 보소서.
나의 고마운 사람아.
아프지 마세요.
선생님.
저는 24살의 혜화 새벽4시의 공기가 아직도 맡아집니다. 당신도 기억할 거라 믿습니다.
밤7시에 시작한 강의가 새벽까지 이어지고도
뚜벅이들 걱정되어 첫차 올때까지 그 남루하던 감정의 편린들을 함께 정리해 주셔 감사합니다.
24살짜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크게 잘못 살은 거라고.
그런데 20대에 이걸 잘 소화하고 나면 정말 멋진30대가 되어 있을거라고 해주신 말씀, 가슴에 새기고 살아요.
미국이니까 미국나이로 할게요.
말씀하시던 20대가 2주 남았습니다.
멋진 30대가 되어보겠습니다.
선생님-. 그러니 선생님도 강건해주세요.
좋은 날 뵙겠습니다.
좋은 날이 곧 옵니다.
기다려주세요.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