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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yking Feb 24. 2023

서른 살, 우울의 원인에 대한 고찰(23) 지속적 자극

#23.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속되는 외부로부터의 자극들.

# 무력감을 주는 요인이 '외부'에  존재할 경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죽고 싶다’는 말은 ‘이대로 살고 싶지 않고, 나는 더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라고. 관점의 차이로 정말 크게 다른 두 문장이 된다. 이 문장들을 보면 누구나 후자의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우울의 늪에 빠져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우울한 상태에서는 ‘지금 이 내 삶은 도저히 바꿀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에 홀려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이 무엇인지와 무관하다. 강한 우울감 앞에서는 우울한 삶이 불변의 것처럼 느껴지며 그 의 ‘나’는 한없이 무력하여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느껴진다. 그렇게 내부에서 솟아나는 생각들은 점점 더 우울을 불러일으켜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외부요인’이 작용한다면 이는 정말로 큰 우울감을 만든다. 외부요인은 말 그대로 정말로 개인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니 말이다.  


#우울은 단단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연약해지는 과정이다. 

우울한 감정은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조금 특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험은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이전보다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나를 성장시킨다. 반면, 우울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이후 비슷한 상황을 만났을 때 나의 연약한 지점을 더욱 명중하며 파고 들어서, 나로 하여금 이전보다 더욱 예민하고 날카로운 반응을 하게 만든다. (심한 경우, 나에게 그것과 비슷한 일련의 경험들은 모두 '트라우마'가 되어 남는다.) 신체로 따지자상처가 영구적인 흉터를 남기는 것과 비슷하다. 감정이라는 것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영혼은 저마다 감정의 흉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나에게는 얼마나 많은 칼자국이 남아있을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저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자국이 남아있을까.


 그 흉터 부분은 너무나 아이같이 여려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완전히 망가져버리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나 자신도 눈치채기 어려운 이런 부분들을 타인이 먼저 알아서 조심해 줄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 부분은 결국 곪고 곪아서 더욱 예민해지게 된다.  바닥에 굳은 살이란 없다.


#유년시절의 상처는 정말 유년시절에만 해당되는가?

 우울증을 파고들다 보면 늘 마주치는 부분이 그 원인을 유년시절에서 찾는 것이다. 내 영혼의 흉터의 근원이 된 첫 상처를 들추는 과정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정말 유년시절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일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유년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 수많은 우울증세가 터져 나오고 있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요즘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신의 이러한 심리를 이해하고 해결해보고 싶은 마음에  수많은 심리상담을 통해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 결과 부모로부터 받은 유년시절의 경험이 문제였다는 것을 겨우 깨닫게 된다. 원인을 찾았으니 이제부터는 지난 유년시절의 나를 성인이 된 내가 치유해 주고 보듬어주리라 맘먹는다. 그러나, 그날 저녁 부모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그녀는 완전히 다시 무너진다. 부모로부터의 상처는 유년시절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그녀에게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본인의 의지로 어찌하기 힘들 정도로 나약해진 상태인데, 지속적으로 그 마음의 상처를 자극하니 과도하게 극성스러운 반응이 나온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군 딸이 되어버렸다.

 이런 경우 과거를 잘 추스르고 받아들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자극을 없애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가 달라지게 할 방법은? 냉정하게 말해서 없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나를 우울의 덫에 걸리게 만드는 뻔하고도 반복적인 자극이 주는 슬픔

내 영혼의 우울에는 분명 원인이 있다. 다만 내가 눈치채지 못했거나,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없을 뿐이다.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원하는 내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그런 환경을 만든 사람이 냉정하게 말해서 '나 자신'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나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외부의 압력일 수도 있다.

나는 많은 우울의 원인을 주제로 꼽아 글을 써봤지만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아무리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의지를 다져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 노력해도, 원인이 외부에 있다면 그것은 금방 무너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겨내는 과정은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고 정신승리 하는 법을 익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벗어날 수 있으면 가능한 한 벗어나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지혜로운 '최선'이란 어떤 것인가?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그것', '그 사람'은 어김없이 나를 우울에 빠지도록 할 것이며, 아마 나는 사전에 미리 예측까지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번에도 또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나는 정말 너무 참을 수 없이 슬플 것 같아... 하지만 너라면 분명 그러겠지.'

그렇다. 어김없이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나의 상처는 덫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더욱 아프고, 세 번째는 이제는 화병이 난다.



#지속적인 외부자극에 우울하게 반응하지 않으려면...

예전에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 저마다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교통사고로 치면 완전히 불구가 되었어.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서 당장은 이 감정에서 도망칠 수는 있지만,  
이것을 겪기 전의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어.


 너무나도 비관적인 이야기라 그렇지 않다고 위로했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 그렇지 않도록 노력해 보자'는 위로에 가까웠다. 나의 경험은 지금의 나를 빚었고, 경험하지 않은 이전의 나로는 갈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고민 중인 부분이지만 지금까지 나의 생각은 아래와 같이 크게 세 갈래로 나눠졌다.


최대한 나의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기. 외부에서 조심해 줄 수 있도록. ( 외부에서 받아들여줄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만약 받아들여지는 경우 의외로 쉽게 자극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특히 연인 관계에서.)


최대한 '그것' 또는 '그 사람'이 주는 자극이 반복될 수 없도록 관계를 정리하기.(만약 그것이 상사와의 관계 등 퇴사하면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인 경우 정신차리고 얼른 그 곳에서 빠져나오기.)


그리고 그보다 먼저 앞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말 외부자극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영향은 주었으나, 사실은 '나의 선택에 의한 결과물'이므로 그 책임은 나에게 있는지 분명히 할 것. 내 탓을 하는 것이 가슴 아플 수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리자는 뜻이라기보다는, 내 선에서 선택을 바꿀 수 있다는, 즉, 오히려 희망적인 상황을 놓치지 말고 깨닫자는 뜻이다. 냉정하게 내가 바꿀 수 있는 영역의 것들이 발견되면 내가 스스로 행복으로 바꾸려 노력하자. 그것만이 내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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