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성인 취미 리듬체조이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취미 수업이다 보니 일반적으로 선수들이 하는 리듬체조와는 다르고, 최근 유행하거나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온 대중적인 곡과 그에 어울리는 안무를 리듬체조의 동작과 함께 배우는 댄스와 체조 그 중간 즈음에 있는 운동이다. 퇴사 후 몸을 좀 움직이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 처음 시작한 운동이었다. 처음에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내 손에 든 빨간 리본이 동그랗게 돌아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에 큰 치유를 받았다. 특히 노래에 맞추어 돌아가는 리본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오른손으로는 리본을 돌리고 왼손과 다리는 다른 동작을 해야 하는데 초보자에게는 이것이 정말 쉽지 않다. 하나씩 떼어놓고 해 보면 전혀 어려운 동작이 아닌데, 오른손으로 계속 리본을 돌리면서 왼손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들어 올리고, 그 와중에 다리는 스텝을 밟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글로 써놓고 보니 그냥 어려운 것 같기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어설퍼서 웃음이 나지만, 거울 속 쟤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노래와 함께 몸을 움직이며 돌아가는 리본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엔도르핀으로 가득 찼다.
어느덧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꾸준히 매달 새로운 곡에 맞추어 안무를 배웠다. 하다 보니 조금씩 실력이 늘었고, 최근 만난 새로운 선생님께서는 내게 “잘하시는데요? 어디서 운동 좀 하고 오신 것 같은데 무슨 운동 하셨었어요?”라고 물어봐주셨다. 나 같은 아마추어 초짜에게 이런 칭찬이라니! 조금씩 왕초보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나의 변화가 대견했다. 칭찬은 노력하는 이에게 정말 큰 뿌듯함을 선물해준다. 나는 그날 집에 가는 내내 기분이 좋아 방방 뛰듯 걸어 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잘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겨나자 스스로 하는 실망의 순간이 점점 많아졌다. 중간중간 엉성한 자세가 나올 때면 안타깝고, 속상하고, 왜 더 잘하지 못하는지 마음은 시무룩해졌다. 영상을 찍어보고, 눈살이 찌푸러지는 자세를 발견하면 교정했다. 그 과정은 역시나 자발적인 노력의 과정이긴 했지만, 처음 마음의 상태와는 조금 달랐다. 잘하고자 하는 기대감이 커지면 늘 끝은 이렇다. 왕초보의 엉성한 동작과 달리 꽤나 능숙하게 처음부터 끝까지를 해내면서도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는 눈에 불이 켜져 있다. 분명 전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욕심의 피해자는 오직 나 자신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일이든, 취미이든, 인간관계이든.
나를 둘러싼 대부분의 것들과 함께 인생을 잘 지내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에, 주변에서는 나를 보고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속이 타들어가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이 업무를 잘 해내기 위해서, 이 취미 활동을 잘하기 위해서, 이 사람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나가기 위해서 나는 욕심을 가질수록 늘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내 속이 시커멓게 재가 되라고 이렇게 나의 애정과 열정을 퍼붓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는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좋아하는 취미생활에 욕심을 낼 때도, 내 직업과 관련된 지식을 공부할 때에도, 그저 인생의 로망이어서 시작한 외국어 공부를 할 때에도 언제나 진심으로 열정을 들이붓다가 결국에는 이내 망가졌다. 상사가 야근을 하지 말라고, 그건 내일 해도 된다고 말을 해주어도 나는 그저 그 말씀을 감사히 여길뿐 달리는 나의 궁둥이에 채찍질만 해댔다. 그렇게 에너지를 소진하다 결국 탈진하여 퇴사를 결정하였을 때, 나의 상사의 첫 반응은 나의 결정에 새삼 놀라지도 않으셨고, 심지어 나를 이해해주셨다. 늘 내게 ‘그렇게 일하면 오래가지 못하여 지치니, 페이스 조절을 잘하라’고 조언을 해주셨었기 때문이다.
전혀 완벽하지 않은 내가 완벽주의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하는 딱 거기까지, 그 마음의 상태까지만 달리고 싶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부리는 욕심과 자발적 채찍질은 늘 나의 정성에 덕지덕지 엉겨 붙어서 함께 온다. 이런 삶의 방식은 인생의 많은 영역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든다. 에너지의 소진은 결국 번아웃과 우울함이라는 결말을 맞이할 뿐이다. 유명한 말 중에 ‘열심히하는사람은즐기는사람을이길수없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이렇게 흔하게 들어서 익숙한, 그리고 익숙하여 명심하기 어려운 그런 명언들을 되새김질하며 명언이 왜 명언이 되었는지를 느끼는 날이 많다.
#욕심이 데리고 오는 친구, ‘비교’
그렇게 무언가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 보면 내 시야에는 점점 ‘우수한 존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분야에 지식과 경험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보다 완벽한 존재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요즘은 SNS를 매일 들여다보는 시대이다 보니, 오프라인에서는 내 곁에 두기 어려운 그런 완벽한 존재들이 내 관심사의 알고리즘을 타고 손쉽게 내 피드에 올라온다. 그들을 보고 있자면 그 과정은 비록 잘은 모르지만, 그들의 결과만큼은 ‘저것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만큼 탐이 난다. 그러다 보면 내가 가진 것을 돌아보게 되고, 내가 그리던 아직은 허접하고 초라한 밑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발생한 비교가 바로 내 시선이 ‘과거의 나 자신’이 아니라 ‘외부’를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SNS를 보지 않으면 되지 않냐고 누군가는 반문하겠지만, 이것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부러운 불특정 다수를 향한 패배감이랑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SNS를 보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종류와는 다르다. 내가 욕심을 가진 애정 하는 분야에 대해 외부의 우수한 존재들을 전혀 보지 않겠다는 태도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더욱 큰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욕심이 불러온 비교’에서 느껴지는 실망감은 주로 두 가지 효과를 발휘한다. 하나, 나도 동일한 결과를 내 손에 넣기 위하여 더욱 의지를 다지며 원래 하던 것보다 더 열심히 그것을 임하는 것. 둘, 주눅 들어 자신감을 잃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마음에 조금씩 재미를 잊으며 욕심을 간직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주변에서 아무도 내게 귀띔해주지 않아도 나 혼자 나의 내면에서 자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 번에 한 가지 영역에서만 벌어질까? 아니다. 어느 날, 나의 내면이 가장 연약해져 있는 시기에 내 피드를 가득 메운 제1의 영역, 제2의 영역, 제3의 영역들 속 완벽한 존재들이 화려하게 펼쳐지면 나는 내 인생의 소중한 영역ㅡ애정과 욕심을 가진 분야ㅡ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실망감을 줄줄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울한 기분에 다시 빠져버리는 것이다.
#욕심에 서투른 내면의 어린아이.
슬픈 사실은 이 모든 시작점에 서있는 ‘나’는 그저 무언가에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욕심을 내고 있는 어린아이라는 점이다. 이 아이가 얼마나 속상하고, 얼마나 주눅 들어 있을지 상상해보면 정말이지 안타까워 이 연약한 존재를 보듬어주고 싶다. 이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끔찍이 소중하게 여기는 한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면 아마도 이 아이의 눈동자를 본 어른인 나는 ‘괜찮아. 더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너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너의 마음을 다치지 말고 행복하게 그것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다정하게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나 자신이라 스스로에게 모질게 군다. 이것이 많은 어른들이 욕심을 두고 범하는 실수인 것 같다.
나의 욕심들은나만 알고 있으니, 다독이기도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겠지. 욕심앞에 나의 내면의 어린아이가 주눅 들어 울지 않도록, 나라는 어른이 보호하고 다독여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