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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yking Nov 23. 2021

서른 살, 우울의 원인에 대한 고찰(19)이유없이.

#19.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예기치 못한 우울감

그동안 많은 우울의 원인에 대해 스스로 경험적인 고찰을 해가면서 글을 써 내려갔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원인에 대해 끊임없이 파헤쳤다. 대부분의 원인에 대해 적었기 때문인지, 한동안 새로운 주제가 떠오르지가 않아 새로운 글을 적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요즘의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을 찾아가면서 우울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에ㅡ 또는 어쩌면 그동안 수많은 고찰들을 써 내려가며 글쓰기를 통해 치유를 받았기 때문에ㅡ 더 이상 우울한 글을 쓸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정말이지 지독한 우울이 나를 찾아왔다.  짧고 강렬하게 강력한 우울의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날 나는 오전에 친구의 결혼식을 혼자 다녀왔고, 볼일을 모두 마치고 나니 오후부터 주말이 비어있었다. 남편은 지방에 다녀올 일이 있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었고, 시간은 아직 오후 4시 정도였다. 평소라면 밖에서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했을 나인데 그날은 주체할 수 없이 몰려드는 우울함과 피곤함에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버스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마구 흘릴 정도로 나는 굉장히도 우울했다.


 왜? 드디어 우울의 그늘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벗어난 게 아니었음을 깨달아서 느끼는 실망감과, 오랜만에 새로운 우울의 원인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다는 기대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열심히 고민했다. 오늘의 나는 왜 우울해졌을까? 분명 그동안의 원인과는 겹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 원인에 대해 찾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들이나, 바꿀 수 없는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전부 한꺼번에 나를 서럽게 했다. 생각에 닿은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슬펐다. 이렇게 뜬금없이 강렬하게 우울한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우울증이란 이성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원인을 찾고 인과관계를 따진다는 것이 애초부터 잘못된 접근인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믿었다. 이유 없는 감정과 기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과학계열을 전공하였고, 이과적인 사고를 더 익숙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과관계 및 사실관계 등을 따지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날은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한 감정’에 대해 경험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 이유 없는’ 우울감에 대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환자이다. ‘비정상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색안경을 끼고 보자는 뜻이 아니라, 일반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상태가 아닌 연약한 상태라 뜻이다.  면역력이 매우 떨어져서 평소에도 원래 주변에 가지고 있던 균에도 갑자기 감염되는 연약한 몸처럼, 원래 알고 있던 사실과 생각들인데도 평소답지 않게 갑자기 우울에 걸리는 그런 연약한 마음이다. 그래서 제 삼자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연쇄적으로 하고, 연결 지을 필요 없는 것을 비관적인 시선으로 연결 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것을 탓하거나, 분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이유 없는' 감정에 대해 분석할 수도, 무언가의 탓을 할 수도 없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옆에 있는 사람이나, 우울한 당사자나 두 사람 모두에게 참 답답한 노릇이다.

 어떻게 해주어야 가장 현명할까. 나의 옆에서 소리 없이 남몰래 우는 우울한 사람을 발견했을 때, 또는 우울에 갇혀 소리 내지 않고 울고 있는 나 자신에게.


#도와줄 사람을 찾아 헤매다 포기하는 과정

 그날의 나는 우울한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정신과 의사’였다. 한 번도 정신과에 찾아가 본 적은 없지만 갑자기 절실하게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최근 오은영 박사님께서 나오셔서 아이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행동의 이유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을 하도 많이 시청해서 그런지, 나도 오은영 박사님과 대화하면 따듯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상을 해보던 나는 이내 포기했다. 첫째, 어떤 병원으로 가야 그런 다정하고도 실력 있는 의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을뿐더러, 둘째, 병원에 당장 달려가고 싶은 심정인데 토요일 오후였고 아마도 예약을 하면 며칠이나 지나서 진료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셋째, 내가 경험했던 진료란, 내가 나의 이야기를 충분히 해보지도 못하고 의사 선생님에겐 학문적인 하나의 사례가 되어 의례히 내리는 처방을 받아서 그냥 돌아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과연 이런 경우에 정신과를 가는 것이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어서였다.

두 번째로 생각난 것은 남편이었다. 하지만 주말에 볼일이 있어 지방으로 운전해서 내려가고 있는 남편에게 이유 없이 우울하다며 울고 불고 징징거리는 소리를 하기가 부끄럽기도 했고, 남편이 만약 나를 위해 다시 집으로 방향을 틀어서 오게 된다면 그의 일정은 다 망쳐버릴 것이고, 남편이 오지 않는다면 ‘아내가 이런 상태인데도 남편이 오지 않았다’며 나 스스로 실망하게 될 것이고, 남편도 ‘아내가 이런 상태인데 볼일을 태연히 보고 있다’는 불편감을 가질 것이다. 상상해보니 나의 감정표출은 두 사람 모두에게 아주 불편한 일이 돼버릴 것만 같았다.

셋째, 친정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 그러나 이쪽으로 생각을 돌리자마자 가슴이 답답하여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가깝지만 타인을 붙잡고 이런 주말 오후에 전화로 갑자기 나의 우울을 표출하기가 너무나 민폐스럽고 갑작스러운 일 같았다. 가족들은 내 말을 들으면 ‘쟤 왜 저러지’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 또는, 너무나도 진지하게 받아주어 버리면 나를 두고 무한한 걱정을 시작하실 텐데 이런 나를 쉽사리 보여줄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지만 나는 한숨만 나왔고, 결국 오늘의 이 감정은 나 혼자 그냥 감당하기로 결정을 했다. 물론 그게 잘 될 리가 없었다.

 우울한 상태에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어도, 스스로 판단에 의해서는 그 ‘도와줄 사람’을 찾아낼 수 없다. 정말로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도와줄 사람이 있어도 우울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울증이 무서운 이유이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알 것 같았다.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우울에 잠식당하여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었겠지.


 그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냥 평소에 늘 주고받는, 용건 없고 일상적인 전화였다. 이를 테면 나는 지금 이런 것을 하고 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니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전화 말이다. 당신은 혹시  이야기에 반전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나는 그때 통화에서 평소와 똑같이 밝은 말투로 오전에 있었던 일을 웃으면서 말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방금까지 이유 없이 창밖을 보며 눈물을 쏟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간단하게 나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숨겼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통화를 하면, 남편은 전혀 나의 상태에 대해 알지 못하겠구나. 내가 만약 정신과 약을 타서 먹는다면 갑작스럽다고 생각하겠지? 만약 내가 우울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뛰어내린다면, 남편은 좀전까지 밝은 목소리로 통화한 아내가 죽었다는 황당한 소식을 듣게 되겠지? 그러면 얼마나 나의 죽음이 의문투성이일까. 모두들 내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정말 궁금하겠다… 그런데 나도 알려줄 수 없어. 이미 죽은 자는 산 자를  찾아와 이야기를 할 수 없을뿐더러, 나 자신도 그 ‘이유’를 잘 모를 테니까.’


 이 글을 읽는 동안 당신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와, 사고의 과정 한번 너무나 극단적이다.’ 또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감정을 왜 호소하지 않았을까.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을 텐데.’ 등등이 생각났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것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울에서 벗어난 내가 지난 그날을 이렇게 나열해 놓고 보니 나 역시 동일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왜 나는 그렇게도 극단적인 생각들을 마구 해보았을까? 왜 나는 아무에게도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을까? 이해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분명히 그날의 나약했던 나의 결정은 ‘도움 요청 포기’였다.


# '이유없는’ 감정의 회복과 그 후

 더 의아한 것은 그 이후 나는 별 일 없이 다시 정상적인 기분을 되찾았다는 사실이다. 이전과 똑같이 출근을 하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퇴근 후 땀 흘리며 운동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거워하고, 남편을 안고서 옆에 있으니 행복하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다. 분명 불과 며칠 전에 엄청난 우울감과 생각들을 차고 넘치게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왜 우울했고, 왜 다시 기분이 회복되었는지 알 수 없을 일이었다.


누구나 이런 감정 기복을 가끔씩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직까지 건강한 정신상태를 회복하지 못하여 삐꺽거리고 있는 중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나라는 사람의 영혼이란 본질적으로 우울한 감정을 타고난 것이라 이 정도는 일상적으로 그냥 경험할 수도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하고도 다행인 사실은 ‘이 또한 지나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가슴에 새겨두기로 했다. 다음에 우울이 나를 엄습하였을 때, 내가 우울에 잠식당하여 그 기분이 이상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모든 것은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나는 괜찮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기. 그것이 내가 깨달은 유일한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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