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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pr 06. 2024

기도의 의미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먼 훗날 그러니까 백만 년쯤 후의 미래 문명을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도 오늘날처럼 기도드리 문화가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그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기도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지금보다도 과학문명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여 어쩌면 답답한 태양계를 벗어나 다른 항성계의 행성으로 이주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쯤이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졌던 애매모호한 의문들이 말끔히 해소되었을 다.


안 죽어봤으니 알 수 없잖아!

혹시 모르잖아 영혼들끼리 따로 모여서 살아가는 세상이 존재할지도!

빅뱅과 현대진화론은 순전히 엉터리야! 초월자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단 말이야.


나는 자칭 물리주의자다. 따라서 육신을 벗어난 영혼의 존재를 딱 잘라서 부정하는 입장이다.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담백한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일 뿐 별도의 사족은 달지 않는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의 기일을 준수하는 대신 그분의 생일을 기억하며 가족으로서의 정을 되새기는 새로운 문화에 동참했다.

사실은 새로울 것도 하나 없는 대단히 래된 문화임을 석가탄신일이나 크리스마스를 통하여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명절날 아침 차례상을 차려놓고도 

'우리를 이같이 행복한 세상에 나게 해 주신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한 후 가족 일동의 묵념으로서 조상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한다.

전승되어 온 전통문화 가운데 콕 집어서 비과학적인 혼령문화를 배격하면서도 후손 된 자로서의 예의는 최대한 갖추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이런 삐딱한 성품을 지닌 어설픈 물리주의자로서도 로는 현실의 답답함을 하소연하면서  해결책을 청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기왕이면 대단히 어려운 난제도 척척 해결할 수 있는 초능력자에게 기도하고 싶은 욕망인데 이율배반, 모순, 이중성이라는 표현이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그렇다 기도!

기도를 짧게 정의하자면 현실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초능력자에게 소원을 간청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짐작건대 어려울 때 기도하고 싶은 이런 마음은 인류의 초창기부터 등장했을 것이고, 아마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 가운데 우리 인간들의 전유물처럼 보인다.


과학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던 인류의 초창기, 모든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였다.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이 취할 수 있었던 행위는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연재해의 원인제공자라고 짐작되는 초능력자에게 살려달라고 청원하는 것과 멀리 도망가는 것.


보편적으로 기도는 불완전한 자가 완벽한 초능력자에게 무엇을 하여달라고 청원하는 형식을 빌린다.

기도하는 자의 청원에 대하여 24시간  세심하게 기울이고 기도에 응답하려면 초능력자는 우리 사람처럼 인지기능이 활성화된 인격체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기도하는 사람들과 원만하게 소통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과학문명의 시대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의 속삭이는 기도 말을 경청하면서 그 소원을 들어줄 전지전능한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지의 팩트다.

어설픈 물리주의자는 우주의 탄생비밀을 138억 년 전의 빅뱅으로 이해한다. 

우리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한 것은 38억 년 전으로서 모든 생물이 공통된 유전적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는 현대진화론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다.


학창 시절, 어설픈 물리주의자가 영혼의 존재여부로 사색할 때마다 떠오르는 잡념이 있었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이 단일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면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집 고양이와 심지어는 화단에 핀 예쁜 꽃들도 혼령이 있어야 한다는 질문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형제자매이거늘 육신의 죽음과 동시에 이탈하는 혼령이 존재하려면 공평하게 다 같이 있던가, 다 같이 없어야 한다는 지극히 자연친화적인 생각이었다.


영혼이라던가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헷갈리게 되어있다.

지만 현대진화론이 등장함으로써 오랜 세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 초월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인류는 진정한 자유를 되찾았다.

역시 쾌도난마의 일등공신은 현대과학이었다.


영혼은 호모사피엔스에게발현하는가?

다른 동식물에서는 없던 영혼이 20만 년 전 출현한 호모사피엔스에서 갑자기 생겼다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그럼 모든 동식물에게 영혼이 있다고? 그래서 나중에 염라대왕한테 불려 가서 심판을 받는다고?

우리 집 강아지한테 염라대왕은 뭐라고 호통치면서 지옥행이라고 말할까?

들고양이를 물어서 죽였다고? 그건 그냥 본능이었을 뿐인데!  

사슴을 잡아먹은 호랑이가 지옥으로 끌려가면서 “그럼 나는 굶어 죽어요?”라고 말할 때 과연 염라대왕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호모사피엔스만 인간으로 태어나는 윤회의 삶이 주어진다면 그 많은 잡풀들과 개미와 개구리들은 항의 시위라도 하지 않을까?

자기들도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그냥 웃자고 긁적여본 말이었지만 현대진화론의 관점에서는 유독

호모사피엔스에서 유체 이탈의 특별한 현상이 나타나는 별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길가의 잡풀들과 개미 모기들까지 혼령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 이쯤 되면 인격신을 인정하면서도 현대과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심각한 모순임을 깨달았다.

이제 분명해졌다!

인간에게만 혼령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격신의 믿음과 빅뱅 현대진화론을 주장하는 현대과학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팩트가 아니다.


과학이 막 태동하던 시기, 단지 지동설과 범심론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이탈리아의 과학자 브루노는 마녀처럼 화형을 당했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끔찍한 고문의 위협 속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360년이 지나고서야 가해세력은 당시의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공식사과했지만 스티븐호킹에게는 종교와 과학의 영역에 대하여 신사협정을 제안했다고 한다.


학은 과학이고 종교는 종교다.

이 명제를 풀어보면 과학은 현실의 영역을, 종교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안겨주는 정신의 영역을 담당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로 간섭하지 말고 자신들의 영역에서 조용히 잘 지내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바로 이것이 인격신과 과학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방안처럼 보인다.


좋은 사례로 코로나가 창궐할 당시 사람들은 과학계의 조언대로 기도모임을 한자리 건너서 한 명씩, 나중에는 아예 비대면으로 전환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코로나와 같은 현실의 문제는 기도가 아니라 과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공유한 결과였다.

종교가 현실생활의 대부분에서 무소불위권력을 행사하던 중세시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과학과 종교의 신사협정이 맺어진 이후 마치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잘 굴러간다.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종교는 종교대로 여전히 그들의 신념을 지키며 잘 살아간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영역 간의 신사협정이 진즉에 체결되었더라면 안타까운 여러 사건들을 예방할 수 있었다.

브루노는 뜨거운 불속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갈릴레이는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가령 신사협정이 체결되지 않았고 중세처럼 여전히 종교가 현실의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확신에 차있다면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단일 조상을 공유한다는 현대진화론과 138억 년 전의 빅뱅을 우주의 시작점으로 보는 이론물리학 마귀의 사주를 받은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학문적인 성과물이 존재해야겠지만 오늘날의 과학 수준으로 볼 때 현실 타당성이 부족해 보인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을 반성하는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본다면 오랫동안 지배해 온 그동안의 신념을 새롭게 수정하는 작업이다.


138억 년 전 창조주께서 우주를 창조하였으니 그 방식은 빅뱅이었다.

38억 년 전 최초의 지구생명체를 창조하였으니 그 생명체가 진화하여 6억 3500만 년 전 동물과 식물로 분화되었다.

동물은 다시 어류에서 파충류로 3억 년 전에는 파충류에서 포유류가 분화되었다.

700만 년 전 마침내 용감한 돌연변이 침팬지가 나무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살기 시작했으니,

그가 바로 400만 년 전에 등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20만 년 전에 등장한 호모사피엔스의 선조였다.


억지로 궤를 맞춘 흔적이 역력하여 피씩 웃음이 터져 나오 적어도 오늘날의 빅뱅이론과 현대진화론의 학문적인 입장에서는 인격신과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인격신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학의 잣대로 함부로 믿음의 문제를 재단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일지언정 우주창조의 역사를 138억 년 전의 빅뱅사건으로 무한정 늘릴 수는 없음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누구를 낳고 아무리 수명을 쭉쭉 늘린다고 해도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육천 년에서 일만년 정도로 추정되던 기존의 통념에서는 얼추 만 배 정도는 늘려야 일억 년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더군다나 침팬지와 인간의 조상이 동일하다는 현대진화론의 주장은 중세였다면 십중팔구 브루노의 신세를 면치 못했을 인격신에 대한 만행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천억 개에 이르는 은하들을 생각해 보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은하들 간에는 초속 70㎞속도로 서로 멀어지고 는데 앞으로도 우리 우주는 영원히 그것도 가속으로 팽창할 예정이다.

우리 지구는 수천억 개의 은하중 우주의 변두리에서 유유자적 회전하는 미리내라는 평범한 은하계에 소속되어 있다.

 

우리의 은하계만 하더라도 무려 수천억 개의 항성들이 질서를 지키며 공전하고 있고,

우리 지구는 태양이라는 그저 그런 항성의 주변을 공전하는 하나의 행성일 뿐 은하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그다지 특별한 존재도 아니다.   

이제 겨우 태양계를 벗어나 머나먼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에는 혹시 만날 수도 있을 외계 지성체에게 들려줄 골든 레코드가 실려있다.

하지만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광대한 우주를 생각할 때 오늘날 인류의 과학 수준은 우주의 대략적인 부분을 어렴풋이 이해하는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백만 년 후의 기도에 대한 의미를 알아보는 차원에서 설정자체가 다소 무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잠시 중간지점을 들려보기로 했다.

주일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과학자들 중에서도 범위를 더욱 축소하여 현대진화론자와 뇌과학자 그리고 이론물리학자가 기도드리는 상황을 상상해 봤다.


직접 물어볼 방법이 없으니 답답하기는 하지만 추정해 본다면 다음 중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

죽은 자의 영혼이라던가 인격신을 부정하는 현대과학의 태도에 대하여 사실 마음속으로는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이것이 아니라면 기도를 들어주거나 응답할 인견신은 실재하지 않을지라도 그냥 내 맘이나 편하자고 하는 습관적인 문화생활로 추정할 수 있겠다.


이럴 때 떠오른 사람이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박사였다.

성탄절 선물로 자전거를 받고 싶다는 어린아이의 기도에 응답할 인격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그 자신 틈날 때마다 기도를 생활화했던 사람이다.

알려진 바로는 모든 자연에 신성이 깃들었다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지지했다고 하는데 인격신을 부정하면서도 대체 그는 무슨 기도를 그리도 열심히 드렸을까?

자신의 기도를 경청하는 이도, 기도에 응답할 초능력자도 없을진대 가성비라고는 1도 없는 이런 무의미한 행위를 지속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물론 그의 기도 대상은 기도하는 이의 소원을 들어줄 능력도 의지도 없는 비인격적인 우주가 분명했지만,

그가 이해한 우주는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상상이 불가능한 무한대의 시공간으로서 그 자체로 위대한 신성이었다.


아인슈타인의 기도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무변광대한 우주를 대하는 과학자로서의 지극한 경외심이었을 뿐, 

답답한 현실의 문제를 하소연하면서 그 해결책을 청원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기복행위는 아니었다.

차라리 명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단지 무궁한 우주와 하나 되기를 바라는 또 다른 의미의 기도로 이해된다.


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비교하면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세상은 그 창조역사와 스케일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인다.  

평생 우물 속에서만 살았던 개구리는 우물이 유일한 세상인 줄 알았고 그 세상이 얼마나 작은 알 수 없었다.

세상의 역사는 무려 138억 년으로 천만배이상 늘어났고 우주의 중심이라던 천동설의 지구는 우리 은하계에서조차 명함도 못 내미는 초라한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


백만 년 후의 미래 문명을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에게도 두 손 모아서 기도드리는 문화가 존재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나와 내 가족을 위하여 인격신에게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는 전통적인 의미의 기도는 아닐 것 같다.

다만 지극한 경외심으로 광대무변한 우주와 소통하기를 바라는 미래형 기도가 아닐까 짐작된다. 

위대한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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