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단우 Oct 13. 2022

소란함이 인생을 잘 사는 척도는 아니야.

나는야 궁핍함과 번아웃 사이에서 흔들리는 아마추어 예술가

아주 마음이 시끄러운 하루였다. 그런 하루하루가 꽤 오래도록 지속되었건만 소란함은 잘 잠잠해지지 않는다. 나에게는 자기혐오의 병이 있다. 자신에게 휘두르는 채찍질이 너무나 가혹해서 아주, 자주 넘어지고 일어서고 한다. 나를 좀 "잘 살게"하고 싶어서 채찍질을 휘두르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턱이 없다. 사유하고 돌볼 틈이 없이 나는 나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아마추어"라는 타이틀은 내 프레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영원히 어설픈 인생인 걸까. 자신감은 나에게 고분고분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열심히 살고 싶어서 정말로 열심히 살았고, 혐오의 언어를 덜어낸 채로 책을 출간했다. 그랬더니 그 안에 담긴 싸인들이 혐오를 준다고 했다. 요목조목 따지는 굴레 속에서 그들의 표현을 빌어 "천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자신감도 많이 없고, 마음이 시끄럽다고 해서 내 자존감을 갉아먹는 이들의 말을 고스란히 수용하진 않았다. 누군가는 그런 리뷰 따위를 읽고 울먹일 수도 있겠지만은, 나는 그들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의 상황에 주목할 뿐. 나를 천박하다고 혹평한 이의 글들을 읽었다. 저명하거나 세기의 대문호까지도 까내리는 것을 보면서 내가 대문호들과 함께 까이게 된 것에 감사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서를 쥐어 주어도 비난할 것이다. 자유롭게 내 생각을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비난할 목적은 전혀 없었기에, 꼭 "목적이 있어야 책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일까?"라는 당위성만 반복해서 되뇌었다.


현학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노골적인 표현을 썼다고 하여 사이다같다는 평이 지배적이었고, 천박하고 단편적이라는 평이 소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었다. 나의 감정과 상황을 완전히 분리하며. 그렇게 비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꼼꼼하게 읽었다는 것이고, 삶에서 그만큼의 에너지와 열정이 있다는 것이겠지. 나는 내가 조롱당했다는 것보다 그 사람들의 열정과 에너지가 부러웠다. 나도 그들만큼 삶을 살아갈 힘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쓰고자 하려는 용기와 기백이 있다면! 그들의 비난보다 내 자신에게서 솟아오르는 비난이 더 가혹하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실은 그 어떤 비난도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타격감은 오로지 나 자신만이 줄 수 있는 것.


"잘 하고 싶다" 또는 "잘 살고 싶다"로 함축된 스케줄러는 언제나 빽빽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라곤 버스에서 잠깐 조는 그 타이밍뿐. 잠깐 졸았다가도 써야한다는 강박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난다. 아니면, 생각이 휘발될까봐 핸드폰에 빨리 기록하고 마음으로 암기까지 한다. 오늘은 이 글을 써야해. 절대 잊어버리면 안돼. 절대로! 재능이 없는 자에게 있어, 아마추어 작가에서 프로가 되는 길은 너무나 가혹하기만 하다. 이렇게 노력하면 성공은 할 수 있을까?


생업을 하다가 글을 쓰고 이동을 하면서 글을 쓴다. 궁핍함에 시달리지만 다행히 취향은 궁핍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아서, 틈이 나는 대로 고전 문학을 구입해서 읽는다. 이런 책들을 펼치면 이런 멋들어진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러려면 물리적으로 시간도 필요하고 여유도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나처럼 길바닥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할 지 가늠해본다. 아마도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 번아웃이 궁핍함을 압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궁핍함을 해소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 어쨌든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 어디든 일감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제는 이런 일상인생의 책무인 것만 같아 좋은 말로는 "아쉽다"는 표현을 하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자신을 이렇게 몰아세우는 나를 혐오한다.


마음과 일상의 소란함이 인생을 잘 사는 척도는 아니다. 열심히 사는 것은 열심히로만 그칠 뿐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있는 것과 같이, 이 와중에도 여타할 보람과 환희는 있겠지만은 그것은 단편적인 즐거움이라는 것을 금세 깨닫는다. 열심은 내적 만족 또는 사회적 인정이나 성공과 비례하는 법이 없는 것인지. 문득 떠오르다 가라앉은 기분의 흐트러짐 속에서 홀로 둥글게 걷기만 하고 있다.


한편,

"자유로운 영혼이예요, 양단우씨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소금물에 절어있던 마음이 점점 기운을 차리는 듯했다. 다만 과제가 주어졌다.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것으로. 스스로 여유를 뺏은 자에게 여유를 주는 것 말이다. 다소 혼란했고 선뜻 "네"라고 답하지 못했다. 나는 무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인가.


오늘의 소란함을 덮고 기도를 했다. 기도 안에 구복과 구원을 바랄 만한 용기는 없다. 막연함과 불안함의 엉겅퀴 사이에서 그저 고요함만을 지켰다. 아무 소음이 들리지 않는, 가만한 시간에 나는 조금의 자기혐오와 채찍질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의 부족함도 괜찮을 것이다. 작은 다독임이 자꾸 내달리기만 하다가 이내 넘어져버리는 아마추어 작가의 자양분이 된다. 속뜻을 헤아리면 충분히 귀중할 그 메시지가, 아마추어 작가의 소란한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오늘은 조금, 푹 잘 수 있겠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세워가는 방식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