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숙과 제이드, 그리고 달려라 아비
문구 구경병이 또 도졌다. 다음 날이 쉬는 날이라는 핑계로 맥주 한 잔 홀짝이며 늦게까지 온라인 아이쇼핑을 즐기다가 늦게 잠들었고, 늦잠을 잤다. 남편은 이미 출근하고 없다.
남편이 내려 둔 커피에 우유를 듬뿍 붓고 다시 데워서 책상에 앉았다. 달력을 보니, 아, 12월 12일이다. 엄마 기일. 한국 시간에 맞췄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매년 든다. 주초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 딴짓하다 깜빡했다. 초를 하나 켜고 엄마를 잠시 생각하는 외에 별달리 거창하게 하는 것은 없지만, 올해도 열 일곱시간 늦게, 엄마를 생각한다.
최근에 읽었던 책 몇 권에서 엄마를 떠올렸다.
첫 번째 책은 오윤희 작가의 <영숙과 제이드>이다. 전체 내용보다는, 초반부에 반복적으로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와서였다.
나 역시 엄마를 잘 몰랐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이드의 엄마가 제이드가 본인을 이해하리라는 기대를 아예 하지 않은 것처럼 (이 작품에서는 언어 문제 및 숨겨야 했던 과거사 때문이라는 게 더 맞겠지만), 나도 엄마에게 그런 기대를 한 적이 없다. 만나서 같이 웃고 같이 밥을 먹지만 내 이야기를 깊이 하는 일은 없었다. 엄마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아마 나도 엄마의 속내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가끔 생각하곤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엄마와 다시 대화를 할 수 있었다면 우리의 관계는 좀 더 달라졌을까?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감사하는 일 중의 하나는, 그런 이유로 관계가 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스러운 부분만 기억해도 엄마를 좋아하기엔 충분하다. 엄마는 귀여운 부분이 많았다.
다른 한 작품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 <달려라 아비>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이 구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너무 좋았다. (나도 내 의사에 상관없이 입석표를 든 채 삶이라는 기차에 타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껄껄).
나의 엄마는 '전형적인' 어머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엄마 삶 중반부에 있었던 건강 상태의 변화도 큰 이유일 테지만. 또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단 한 번도 여자가, 큰딸이, 등의 도리를 강조하는 이야기를 한 적도 없고, 역할을 강요한 적도 없다. (내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다. 내가 그냥 말을 안 들은 걸 수도. 껄껄) 그 덕택인지, 내 스스로를 관찰해보건데 ‘전형적인’ K-장녀나, K-아내와는 거리가 멀다. 어째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은 각자 개인주의가 강했고, 나도 모르는 새 개인주의자로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엄마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 이 얘기도 나중에 할 기회가 있겠지)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엄마가 떠오른 것 같다. 당당한 관계.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나와의 관계를 유지했고, 그걸로 충분하다. 지금의 내가 엄마와 이야기를 해도 여전히 속이 터질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엄마는 엄청 귀여우니까.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