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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 Feb 01. 2023

옷빨, 머리빨, 금이빨보다 끗빨나는 촌빨

새벽 6시 37분, 동동은 곤히 잠든 시간,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동동의 엄마, 외숙은 이 시간이면 아침을 차려 먹고 일과 하나는 거뜬히 끝냈을 시간이다. 동동이 독립한 후로 둘은 서로 다른 시차에서 살고 있다. 게으르고, 부지런함의 문제가 아닌 도시는 밤이 길고, 시골은 아침이 길어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외숙은 동동에게 묻는다.

 “오늘 집 부숴야 하는데, 니 책들은 다 어떡할꼬?”

 집을 부수는 이유는 너무 오래되고 낡아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서다. 책은 앞으로도 찾을 일이 없을 걸로 생각하고 버리라고 말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마미와 전화를 끊은 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자꾸만 과거 기억들이 동동의 눈꺼풀을 두드려 잠을 못 이뤘다. 집을 부순다니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나 보다.


엄마와 아빠의 대구 시티드림이 4년 만에 막을 내리고 동동의 가족은 다시 의성군으로 내려왔다. 동동의 집은 현관문을 열면 트랙터, 경운기, 이앙기 등 농기계가 가지런히 줄 서 있고, 대문을 열면 논과 밭이 펼쳐진 시골집이다. 옆집에선 소도 키운다. 동동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도시의 아이들에겐 신기하게 보였나 보다. 동동이 가끔 도시 친구 앞에서 부모님이 마늘 농사 짓는다고 말하면 그들은 웬만한 예능인 리액션 저리 가라다. 특히 옆집에서 소 키운다는 말까지 하면 그날 하루 이야기 주제는 빼도 박도 못한 채 ‘의성’이다.

 “와, 그럼 너희 집에 아궁이도 있어?” / “너희 집에 땅 많겠다. 지역 유지 아냐?” / “너희 집은 소 안 키워?” / “어릴 때 마늘도 캤어?”

차례대로 하나, 둘 대답해준다. 하지만 가끔 순수한 호기심이 도를 넘어 은근한 무시로 들릴 때가 종종 있다. 도시 아이들의 주거 환경이 아파트란 걸 알았을 때

 “몇 평이야?” / “너희 집 티비는 몇 인치야?” / “그 동네 살아? 너희 부모님 부자겠네”

 라고 묻지 않듯 동동에게도 도시 아이들의 배려가 필요했다. 어쨌든 동동이 도시 아이들을 처음 만난 건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동의 대학 시절은 용인에서 시작했다. 19살까지 경상도 밖을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던 동동이 처음으로 경기도까지 올라온 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용인도 대도시는 아니지만, 그때 동동에게는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아주 생경한 대도시였다. 본인이 시골 아이란 걸 인지하는 순간이랄까?


일단 첫 번째, 말투. 동동은 자신이 쓰는 말투가 표준어인 줄 알았다. 신기한 건 19살 때까지 티비를 안 본 것도 아닌데, 왜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표준어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동동도 쓰고, 옆에 친구도, 담임선생님, 심지어 잉글리쉬 티저의 악센트까지도 같은 말투이니 그게 표준어라고 착각한 걸까? 아무튼, 두 학기를 용인에서 보내며 동동의 말투는 점점 세련(?)되어 갔다. 이제는 태어난 곳을 밝히지 않으면 서울토박이, 깍쟁이로 본다. 훗.


두 번째는 감출 수 없는 촌빨. 학창 시절, 별일 없으면 초등학교 때 친구가 고등학교 때까지 쭉 이어졌다. 한 학년에 4개 반 정도로, 대구나 경주로 유학을 갔던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면 그곳에서 우린 오순도순 살았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자, 새로운 친구들을 무더기로 만나게 되었다. 무려 백 명이나! 2~4학년 선배들을 포함하면 298명쯤 될 것 같다. 자기 소개하는 시간에 298명의 눈이 동동을 빠르게 스캔하는 게 느껴졌다. 첫인상 평가는 3초도 걸리지 않는 매우 간단한 작업이다.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바보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뒀는데, 그 모습이 바보처럼 비춰졌을 것 같다. 지금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소개하는 건 쉽지 않다. 19년 동안 가지고 있던 내 촌빨은 어쩔 수 없이 묻어나오나 보다. 지금까지도 징글징글하게.


세 번째는 깍쟁이의 발견. 관계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내가 잘해줬다고 해서 상대방도 나에게 잘해주길 바라지 않기. 기대하는 순간 실망하게 된다는 걸 동동은 수많은 깍쟁이에게 데인 후 깨달았다. 그렇다고 동동이 늘 피해자란 건 아니다. 동동도 누군가에겐 깍쟁이처럼 보였을 수 있다. 결론은 본인의 주관대로 행동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


동동의 20살 2월, 고등학교 졸업식, 곧 용인으로 올라가야 하는 동동에게 친구가 비장하게 말했다.

 “주먹 꽉 쥐고 다녀래이, 누가 뭐라하면 바로 칠 수 있게. 알겠제?”

 (이게 표준어인 줄 알았다)

 헛웃음이 픽 나왔지만, 멋진 말을 해준 친구에게 동동도 비장하게 되받아쳤다.

 “알았다. 선빵 날릴게”

 지금도 가끔 지하철에서 미심쩍은 사내들이 보면 일단 주먹부터 말고 본다. 아, 이보다 더 촌빨 날릴 수 있을까!


/ 동동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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