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물속) 해방일지
동동은 주기적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하는 취미가 있다. 연말이든, 연초든, 월말이든, 월초든 시기는 상관없다. 다만, 회사 일이나 주변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훌쩍 떠나고 싶을 때면 나열해본다. 예를 들면, 배에 왕(王)자 만들기, 책 출간해서 친구들에게 싸인해주기, 영어 실력자가 돼서 쫄지 않고 외국인들과 대화하기,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기, 수영 배워서 해변에서 여유롭게 놀기 등. 어떨 때는 리스트가 스물일곱개가 넘기도 한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리스트를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이내 문제점를 발견한다. 멋진 미래의 동동과 지금의 동동은 너무 멀리서 살고 있다는 점. 미래로 가는 길이 너무 까마득하고 막막해 현실의 동동은 출발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 동동은 마음의 준비를 꽤 오래 한다는 점. 여러 이유를 종합한 동동은 다시 현실에 안주해버리고 만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행복의 맛을 쩝쩝거리며 되새김질하던 6월의 어느 주말, 동동은 깊은 인연이 있는 J와 함께 을왕리에 가던 전철 안이었다. 우리는 다낭으로 가기로 한 여름휴가 계획을 짜고 있었다. 을왕리로 놀러 가면서 여름휴가 계획을 짜는 우리가 새삼 부지런한 MZ처럼 느껴진다. 바다 가까이에 있는 수영장 딸린 숙소를 예약하며 J가 말한다.
“물을 안 무서워해야 재밌게 놀 수 있을 텐데, 괜찮겠어? 이번에 그냥 수영장 같이 다닐래?”
J는 물을 좋아하는 속초사람이라 빠져 죽지 않을 수영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동동의 만학수영욕구 또한 잘 알았다. 그렇지만, 물을 무서워하는 동동은 쉽사리 대답을 못 내놨다. 당시만 해도 수영을 배울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다. 평일엔 회사를 나가야 하고, 수영복을 입을 몸이 안 만들어졌고, 자신의 수영하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됐고… 구질구질한 변명들이 동동의 머리를 헤집고 다니는 사이 J는 답을 내놨다.
“이번에 수영 끊자.”
J가 가끔 이렇게 확신에 찬 답을 내놓을 땐 따라야 한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수년간(어쩌면 평생) 핑계를 대며 미룬 게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 길로 J와 동동은 거침없이 수영복 쇼핑, 수영장 위치 탐색까지 마쳤다. 말 그대로 일사천리. 핑계를 대며 미룬 지난 몇 해가 무색해졌다. 그렇지만 동동의 마음 속 한쪽엔 불안함이 늘 존재했다. 첫 수영 수업 전 날 저녁 동동의 유튜브 검색기록을 공유하자면 ‘수모 쓰는 법‘, ‘수영복 속에 속옷 입나?’, ‘수영장 물 깊이’, ‘물에 뜨는 법’, ‘수영장 준비물’ 등 몸은 물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머리는 이미 수영장을 다녀왔나 보다.
그중 가장 걱정이 됐던 건 수영 모자였다. 수영복은 사이즈별로 맞춰 입지만, 수모는 아니다. 성별, 두상, 머리카락 길이와 상관없이 대부분 프리사이즈 수모를 쓴다는 점이 이해가지 않았다. 사람마다 머리 크기가 다 다른데, 원사이즈라고? 말도 안 돼! 걱정은 꼬리의 꼬리를 물어 수영장에서 수모를 못 써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상상까지 들게 했다. 끔찍하다. 유튜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능숙하게 수모를 쓰기 위해 동동은 전신거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영을 배우기 위해 수모 쓰는 것도 연습해야 한다니 갈 길이 멀군! 물기 하나도 없는 머리에 수모를 억지로 밀어 넣으니 생 머리카락이 뜯겨 우수수 빠져 아프기까지 했다. 어찌어찌 수모 속으로 머리카락을 숨긴 동동은 이 참에 수경, 수영복까지 풀착장으로 입어봤다. 거울에 비친 수영장 착장이 꽤나 늠름하고, 자랑스럽다! 이 위대한 한 걸음, 놓칠 수 없지. 셀카 한 장 찰칵.
대망의 첫 수업 날! 동동은 엄살 심한 치와와처럼 잔뜩 쫄아있다. 입학식, 입대일, 첫 출근, 첫 글방 출석 날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동동은 긴장한 걸 티 안 내려 일부러 복어처럼 어깨를 더 부풀려 스트레칭한다. 처음 왔냐는 강사의 질문에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깔아 대답했다. “예.” 그렇지만, 실력은 숨길 수 없는 법. 동동은 허벅지까지 오는 유아용 풀장에서 물 먹으며 허우적대는 순간 몸부림치며 모든 자존심을 버렸다. ‘일단 물에서 떠보자!’ 라고 속으로 외쳤다.
내가 느낀 수영장의 룰은 제법 잔인하다. 처참한 내 수영실력을 모두가 보는 눈 앞에서 공개처형 당하기 때문이다. 유아용 풀장에서 수강생들은 금세 레인 끝을 찍고 다시 줄을 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수영을 구경하는데, 보통 7~8명 정도가 앞 사람의 수영을 구경했다. 그 눈들이 부담스러워도 도망갈 수도 없다. 그냥 빨리 물 안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자유형 수영을 머리로만 이해한 동동은 허벅지 높이 풀장에서 허우적대다가 숨쉬기를 못 해 결국 레인 중간에 우뚝 기상해버리고 만다. 유아용 풀장에서 우뚝 선 동동의 신체에 비해 물높이 너무 낮고, 물 밖에 신체가 생각보다 많이 노출되어 ‘내 키가 이렇게 컸었나?’ 라는 생각을 하다가 조용히 줄을 선 대열에 합류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길 몇 번, 동동의 수영 실력은 그대로인데, 수영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도를 나간다. 참나 이번엔 배영이란다. 빌어먹을 물을 또 먹을 생각에 동동은 벌써 배부르다. 자유형은 숨 쉬고 싶을 때 땅을 짚고 일어나버리면 그만인데, 배영은 몸을 뒤집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코로 들어가는 물은 다 어떻게 하라고?! 선생님은 물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알려주는데, 동동은 물속에서 재빠르게 탈출하는 법을 배운다. 실제로 순발력 하나는 많이 는 것 같다. 선생님과 학생의 입장차이가 극명하다.
동동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된 배영시간. 수강생들이 릴레이로 배영을 시작한다. 동동 앞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간다. 두 사람, 한 사람... 이제 출발해야 한다. 앞사람들의 배영을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은 끝냈다. 양 팔을 귀 옆에 바짝 붙이고, 턱은 당긴다. 두 발을 바닥에서 떼며 물에 몸을 맡겼다.
‘마이클 펠프스도, 박태환도 배영을 처음 배울 땐 이랬겠지?’
멋진 출발을 했다는 생각도 잠시, 강제 잠수한 얼굴이 물 위로 나오질 않는다. 코, 입, 귀로 물이 다 들어온다. 동동은 켁켁 거리며 또 레인 중간에서 우뚝 기상해버렸다. 허벅지 위 서늘한 공기와 강사님의 시선이 느껴진다. 부끄럽고, 멋쩍을 땐 그냥 웃는 수밖에. 남은 레인은 걸어서 다시 대열에 합류한다.
바다에서 유유자적 놀고 싶어 수영장에 온 첫 날, 동동은 목적을 잊은 채 오직 물 밖으로 탈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물과의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자기 몸이 콜라병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위안이 될 만한 사실은 수영하기 위해 첫걸음을 뗐다는 점이었고, 예전엔 아예 물에 안 들어갔지만, 이제는 물과 맞짱 뜰 정도의 자신감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생각보다 즐겁고 설렜다. 동동은 평일이든, 주말이든 수영장을 가기 위해 시간을 쪼갰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그 과정까지 즐겁다니! 이보다 완벽한 인생이 있으랴! 지금 동동의 가슴속에는 마이클 펠프스가 주인 허락도 없이 입주해버렸다. 그나저나 수영장을 다녀온 날이면 물을 많이 먹어 소변을 보러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일이 잦아졌다.
/동동 씀